새밭 60년사

    새밭 60년사

      우리 새밭교회의 뿌리는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의 초기 장로교회에 닿아있다. 우리 교회가 몸담고 있는 교파인 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인 김재준, 송창근 목사의 고향이 함경도였고, 기독교장로회의 교육기관인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학교)의 핵심 지도자였던 김대현 장로, 문익환 목사의 고향은 북간도이다. 우리 교회의 설립을 주도하신 정봉조 장로나 함께 교회의 씨앗이 되신 초기 교인들 대부분의 고향이 함경도였다. 우리 교회에서 첫 전도사 생활을 하신 김해철 목사가 우리 교회와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장로들이 즐겨 들던 오장동 함흥냉면을 처음 맛보았던 것을 꼽을 정도로 우리 교회의 이북, 함경도 풍취는 강했다.

      이런 사정은 초기 기독교의 선교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한말이 되면서 우리나라에 여러 기독교 교파가 선교를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물론 장로교 선교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로교 측은 1893년에 장로회 활동을 위한 미션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면서 한국의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 및 경전을 사용하는 장로회의 연합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공의회는 그 소속 선교회에 대하여 권고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장로교회가 완전히 설립되기까지는 한국의 전 교회에 대하여 전권을 가지고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상급모임 구실을 하였다. 

       이 공의회가 시행한 일 중 하나가 선교 지역의 분할 관리였다. 이것은 선교 사업을 하는 기관이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 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로 분할하는프로그램이다. 연합해서 피차 협력하려면, 하는 일과 지역을 분할해야만 할 때가 있다. 사역하는 지역을 나누어야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와 간도, 미국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대략 분할하여 선교 구역으로 각각 맡았던 것이다.

      이 분담은 물론 선의의 분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특성에 투영되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미국 북장로교의 입장은 매우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우리나라 목회자나 교회의 권한에 제한을 두면서 미국 선교사의 지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미국 북장로교가 관할했던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의 교회와 그 인사들은 강한 보수색과 친미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반면 캐나다 장로교는 선진적인 신학을 교육했으며 우리 민족 교회의 자율적 성장을 최대한 인정하고 한민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캐나다선교부의 바커, 푸트, 마틴이 192010월 일본군의 간도토벌이 자행된 학살현장을 답사하고 그 참상을 세계에 소개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시 위험한 환경 아래서도 이재민의 구호사업을 전개하여 식량을 나누어 주고 상해자를 치료하고 시체 처리를 손수 거들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영향으로 캐나다 장로교가 관할했던 함경도와 간도 출신 교회와 인사들은 진취적인 신앙과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 것이다. 우리 새밭교회와 기독교장로회가 진취적 신학과 신앙,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실천하게 된 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게다가 함경도와 북간도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던 공간이었다. 그곳이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력이 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민족의 독립번영을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을 망하게 한 낡은 유교 체제로는 보장할 수 없었던 민족의 미래를 선진적인 기독교 사상을 통해 극복해보고자 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흐름과 캐나다 선교부의 입장이 만나면서 이 지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화된 셈이다. 임시정부의 부주석을 지낸 이동휘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동휘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동시에 목사로 활동하면서 교회운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해 나갔다. 선생은 이렇게 설교하곤 했다고 한다.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만 우리도 서양문명국처럼 잘 살 수 있다. 삼천리 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는 날 우리는 독립할 것이다.”

      이동휘 선생은 이런 신념을 가지고 당시 민족주의 세력의 근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 전략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한다.

      당시 명동촌은 후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간도 대통령이라고 불리었던 김약연 선생의 집안이 주도하는 가운데 윤동주 시인을 낳은 윤씨 집안, 문재린문익환 목사를 배출한 문씨 집안 등의 함북 지역 명문 네 가문이 일제 강점의 치욕을 이겨내기 위해 집단 이주해 있는 상황이었다. 명동촌은 이름 자체가 동쪽, 즉 우리나라를 밝게 세운다는 뜻을 가진 항일 공동체였다. 이 독특한 공동체는 자신들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학 서당을 폐지하고 근대식 학교를 세우기로 어렵게 결정한다.

      김약연 선생을 비롯한 가문의 지도자들은 이를 추진할 만한 지식인을 널리 구했는데, 이때 거기에 호응한 정재면 선생은 바로 이동휘 선생이 민족주의적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기독교와 신문명과 신교육을 수용하지 않으면 민족의 앞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재면 선생은 가문의 어른들을 설득해 후에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가 다니게 되는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나아가 명동교회를 개척한다. 명동촌을 만들고 그 안에 서당부터 만들었던 이 마을의 어른들이 기독교를 금방 받아들인 일은 의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당시 신학문을 하려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고, 유럽 강대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일제의 탄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명동촌의 가문들은 일제히 유교의 전통에서 기독교의 새길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이 때 만들어진 명동교회가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에 표현된 바로 그 교회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  동주 시인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고결했던 명동 교회는 이후 독립운동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 그림 1 당시 명동교회 모습

     

    명동 학교를 세우고 명동 교회를 만들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일꾼들을 길러낸 정재면 선생이 바로 우리 새밭교회에서 초기에 임시당회장을 역임하신 정대위 목사님의 아버지가 되신다. 정대위 목사님 스스로가 훗날 건국대학교 총장까지 맡으신 큰 인물이시지만, 아버지로부터 배운 드높은 기상을 간직한 채, 초기 한국신학대학과 우리 교단을 이끌고 새밭교회를 이끌어 주신 것이다. 정재면 선생도 19657월 당회에 아들이 당회장으로 있는 새밭교회를 살피러 참관하신 적도 있다. 명동촌으로부터 이어지는 기상은 우리 교회의 참으로 자랑스러운 전통이 아닐 수 없다.

      정재면 선생이 일군 명동교회에는 임시정부 국부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가끔 와서 부흥회를 했다. 명동촌의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로 그는 사흘을 내리 출애굽기로 설교했다고 한다. “하느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주신 것처럼 우리 민족도 해방시켜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까운 거리에 일본 경찰서와 헌병대가 있는데도 이동휘 선생은 개의치 않고 민족의 해방에 대한 설교를 했다. 이런 분위기가 명동촌의 특성 중 하나였다.

      이동휘 선생은 민족 해방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남여 평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고 한다. “새가 어떻게 날개를 하나만 가지고 날 수 있으며, 수레바퀴가 하나로 굴러갈 수 있는가?” 선생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을 집안에 가둬놓고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설파했다. 극일을 위한 길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자 명동촌의 남성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휘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명동촌이 바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이름도 없이 살아가던 여성들에게 이름이 생겼다. 정재면 선생은 마을 여성들에게 모두 주님 안의 자녀라는 뜻으로 믿을 신자 돌림으로 이름을 짓자고 제안했다. 정재면 선생의 말을 듣고, 줄줄이 김신묵, 정신태, 주신덕, 김신정, 김신훈, 김신국, 김신우, 김신근, 문신린, 문신재, 문신열, 문신학, 윤신영, 윤신진, 윤신현, 한신환……들이 등장해 며칠 사이에 명동에 자 돌림의 여성이 50명으로 늘었다.

      후에 문익환 목사는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교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 의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 자 항렬로 한 동기가 되었던 것 아닙니까? 신 자 때문에 가문 족벌의 장벽을 훨훨 떨쳐버리고 한겨레 의식이 확인 확산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기독교 정신이 우리 기독교장로회를 이루는 큰 힘이었다. 그래서 교회사 연구자들은 북간도에 있어서 이주 한인들의 기독교운동은 독립운동, 교육운동, 사회운동 등과 서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명동촌은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를 앞두고 사격 연습을 하던 곳도 이곳이고, 독립운동가치고 명동촌에서 밥 한 끼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활동 속에서 마을의 지도자였던 김약연 선생은 간도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국신학대학의 설립자 중 한 분인 송창근 선생도 명동에서 이동휘 선생의 애제자가 되었다. 이동휘 선생은, 북간도 독립군 군관학교가 운영난에 부딪히자 문을 닫고 독립 운동의 내일을 꿈꾸며 시베리아로 떠나면서, 함께 따라나서려는 젊은 청년 송창근에게 너는 본국에 돌아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라는 엄명을 내렸다.

      독립투사의 길을 포기한 청년 송창근은 다재다능하고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속 깊은 인재였다. 그 뒤 송창근은 서울에 일찍 진출하여 피어선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 교회 전도사가 되어 일하다가 그 무렵 고향에 내려와 있던 두 살 아래 청년 김재준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김재준은 선배들이 땀 흘린 간도로 들어와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명동촌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명동학교는 인가된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용정으로 나와 기독교 계열인 은진중학교에 가야 했다. 그래서 문익환 등의 명동촌 학생들이 은진중에서 김재준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동휘-정재면-송창근-김재준-문익환으로 이어지는 인연은 그대로 한국신학대학과 기독교장로회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그 인물들이 공산주의의 탄압을 피해 내려오면서 지금의 한국신학대학을 남쪽에 세우게 되었고, 우리 교회는 이런 기장의 흐름을 이어받은 신앙의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함경도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민족 내부의 신앙인들 중 하나가 우리 교회의 설립자이신 정봉조 장로이다. 교회 기록에 의하면 정봉조 장로는 22세 때인 1913년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정봉조 장로에게는 상당한 재물의 축복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여유로운 재산을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썼다. 고향 부근에서 인상리 교회, 영흥읍 교회, 고원읍 교회를 설립하거나 건립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다. 또 함경도를 거쳐 가는 당시의 선교사나 우리 민족의 목사들을 대접하는 일을 철저히 준행하였다고 한다. 정봉조 장로가 대접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면면에는 물론 정재면, 송창근, 김재준 목사가 포함되어 있다. 월남하기 전부터 정봉조 장로와 기독교장로회와의 인연은 단단히 얽혀있었던 것이다.

    194557세의 나이에 반일운동의 혐의로 투옥 중 해방을 맞아 고원군 안녕질서 유지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새로운 하나님 운동을 시도하던 정봉조 장로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이북 지방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함경도와 북간도 출신 기독교인들이 민족주의 운동 세력이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치 않았다. 기독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친미 성향의 반민족 세력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약연 선생 이후 명동촌의 차세대 지도자였던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아버지)가 소련군에게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살아남아 캐나다에서 선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엘리트 민족주의자 문재린 목사가 오히려 해방이 된 후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비극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봉조 장로도 재산을 몰수당하고 반동분자로 몰릴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을 하며 뿌린 사랑의 씨앗은 헛되지 않았다. 마침 함경남도 부도당위원장을 맡던 공산주의측 인사가 정봉조 장로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라, 정장로의 재산을 모두 금으로 바꾸어 준 다음 가족과 함께 배편으로 무사히 38선을 넘을 수 있게 배려 해주었다. 정봉조 장로가 재산을 유지한 채 남하하여 새밭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민족주의적 기독교인으로 활발한 항일운동과 개혁운동을 펴던 인사들은 공산주의를 피해 남하하고 이들은 남한 곳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다. 그 중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프린스턴 삼총사라 불린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목사는 힘을 합쳐 조선신학교를 세우는데, 이것이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이다. 여기에 문익환, 장준하, 정대위, 안희국 등 명동의 후예들과 그 영향력 아래 있던 민족주의적 기독교 세력이 모여들면서, 제국주의의 침탈을 이겨낸 자생적이고 진취적인 기독교 정신으로 단련된 조직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민족상잔의 625전쟁이라는 또 한 번의 고난을 겪어야 하지만, 이때의 힘이 오늘날까지 기독교장로회의 힘이 되고 있고 새밭교회 기상의 샘물이 되고 있다.

     

      전쟁 직후에는 이른바 피난민 교회들이 많았다. 이북에서 신앙을 지켜오던 분들이 이남에서 세운 교회를 일컫는 말이다. 강흥순 목사, 정봉조 장로, 황재왕 장로 등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세운 교회인 동부교회도 이런 피난민 교회 중 하나였다.

      동부교회의 담임목사인 강흥순 목사와 정봉조 장로는 사돈지간(강목사 아들과 정봉조 장로 큰딸이 부부)이었는데, 교회의 비전과 운영에 있어서 견해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부교회 건립에 큰 공현을 한 황재왕 장로의 재산권을 두고도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장로를 중심으로, 황재왕, 정승호 등등의 장로와 교인들이 독립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리라 마음먹고 출범시킨 것이 우리 교회이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맨땅에서 다시 교회를 시작하기로 한 새밭교회 선구자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진실과 사랑과 화평을 찾는 것이었다. 후에 그들의 의견을 정리한 것을 보면 이때의 교회에 대한 비전은 사랑의 공동체로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구별을 삼갈 것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를 원했다. 이는 교회 창립 21주년을 맞아 정리된 새밭교회 신앙고백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서론

    새밭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교회가 출범한 지 어언 21년 그간의 많은 진통 속에 새밭교회라는 참으로 더딘 발전을 해왔지만 어느 때고 후회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 자부)를 가지며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새밭교회가 동부교회를 떠나 항해를 다짐하던 74의 교회를 통한 공동 신앙고백에 대해 쓰고자 한다

     

    진실과 사랑과 화평을 찾아

    새밭의 초창기 74은 참으로 모험 속의 항해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튼튼한 배도 무사히 육지로 인도할 선장도 굶주림 속에서 구출할 넉넉한 식량도 무엇 하나 현실적으로 채워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참으로 귀한 것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성경이다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그 말씀을 이 세상에서 이루기 위한 신앙의 노력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였던 것이다머리엔 성경을 한 손엔 사랑을 이렇게 출범한 것이다

    어려움 속에 하나됨을 보여준 2번째 케이스가 1959. 7. 1 신당동 177번지 2층 예배 장소를 정하면서 교회의 명칭을 새밭이라 명한 것이다

    새땅을 일구어 하나님의 사랑을 심고 가꾸며 꽃을 피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사랑의 열매를 맺어 평화(화평)의 씨앗을 얻고자 새밭이라 했으니 이 얼마나 성경적이며 신앙적인 이름인가!

     

    새밭 초창기의 신앙생활

    새밭 74인의 교회를 통한 신앙고백을 쓰고자 하면 동부교회 얘기를 쓰지 않을 수 없겠다

    당시 동부교회는 가진 자(물질적으로)들만이 모인 어떤 그룹을 형성못 가진 자를 냉대하며 자기들만이 어떤 사업을 행했으며 사랑이 없고 대화하기 힘들며 신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이에 정봉조 장로님을 위시한 74이 드디어 하나님께 고백하며 모든 것을 맡기고 대용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여기서 74의 교회를 통한 신앙고백을 보면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구별을 삼갈 것과 교회는 크지 않은 조그마한 교회를 원하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를 원했던 것 같다그 예로 예배당 장소가 변변치 않아 전세로 전전하면서도 익명으로 신학생 보조와 어려운 이웃에게 물질적인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실천이라 볼 수 있겠다또한 당시 여신도회에서도 신학생들과 어려운 이웃 구제 사업을 활발히 했던 것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74들의 신앙은 보수적인 것이 뜨거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그 뜨거움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은혜파쪽의 뜨거움이 아니라 어떤 정적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사랑적인 뜨거움이라 생각한다

     

     결론 <신앙관>

     연혁을 한답시고 당시의 74의 여러분을 만나본 결과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설립 이념 신앙관을 종합하면 

     

    1.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나 세상에서 분리될 수 없다.( 17:11)

    1. 우리 교회는 남녀연령종족사회의 계층 분화적 가치를 넘어 인간적 요소와 제한 속에서도

        거룩한 목적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자들을 포함한다.   

        ( 1:22-23,  21: 22-27)

    1. 우리는 이 땅에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기 원하며 그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할 것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고백이었다 생각한다

     

    우리의 고백

    현재 새밭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 속에서도 초창기의 사랑이 그리워지며 그 당시 사랑의 실천이 그리워짐은 왜인가현재 우리 새밭교회는 너무도 세속화되어 있다는 말인가조그마한 교회가 되더라도 교회가 할 기능인 교육하며 선교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이 신앙고백서를 보면 새밭교회의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평등한 교회, 세상 속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를 꿈꾸었다. 1980년의 이 고백에도 나와있듯이 초기 교회의 신앙고백을 실천하고 있는지 자못 돌아볼 일이다.

      새밭교회의 첫 출발은 미약했다. 일흔 네 명의 식구들은 예배당 건물도 구하지 못한 채 장충단 공원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그때가 1959614일 둘째 주일이었다. 장충단 공원에서 예배드린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생활의 근거지 근처에 그 식구들이 다 함께 할 넓은 공간이 그곳밖에 없어서였다. 당시 첫 예배에 설교를 맡았던 분은 이동섭 목사였고, 참석자로 기록된 분들은 동부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정봉조, 황재왕, 정승호, 안병건 장로와 한요한 집사, 계의화 전도사, 장순찬, 장상은, 우보을, 김해룡, 권삼규, 주서분, 장희철, 김계성, 염초섬 등이었다.

     

     ▲ 그림 2 1959 6월 14일 장충단공원 첫 예배후


    당시 참여자들의 명단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다만 1959년도, 1960년도 제직의 명단이 남아 있어 당시 참여했던 분의 대강을 알 수는 있다.

     

    1959

    1. 교역자 : 전도사-김계성

    2. 장 로 : 정봉조 안병건 황재왕 정승호 한요한

    3. 집 사 :

    남자-장의순 박승남 신승철 장서인 전한열 홍종렬 김해룡

    여자-김영애 김순희 최은영 주서분 탁대열 권상규 황병숙 염초섬 한신희 장상은 김월계 김금순 최성진 계의화 최점향 우보을 김갑실 이경온 최옥순 신길순 이유향 윤태원 장희철

     

    1960

    1. 교역자 : 강도사-안희국, 무임목사-이동섭, 여전도사-김계성.

    2. 장 로 : 정봉조 안병건 황재왕 정승호 한요한, 협동장로-박승남 김보라

    3. 집 사 :

    남자- 신승철 장의순 장서인 전한열 홍종렬 김해룡

    (신임) 김경조 신삼희 김태유 곽성환 한창익 황희연

    여자-김영애 김순희 최은영 주서분 탁대열 권상규 황병숙 염초섬 한신희 김월계 김금순 최성진 계의화 최점향 우보을 김갑실 이경온 최옥순 신길순 이유향 윤태원 장희철

    (신임)정정실 김건홍 장순찬 박만선 금순옥 장재련 정일의 최종선 이숙자 김홍순 이영애

     

      첫 예배 후에는 동대문 앞 창신동 정봉조 장로 사택에서 예배를 드렸다. 제직회 등도 정봉조 장로 댁에서 소화했다. 그럼에도 즐겁고 행복했었다고 당시의 신도들은 고백한다. 교회란 번듯한 건물이 있어서 교회가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모임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때는 마음이 맞는 분들이고 또 고향이 이북인 분들의 모임이라 매우 가족적이고 동호회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을 하건 신명 나게 일이 추진되곤 했다.

       삼 주 정도를 그렇게 보낸 후 동대문 전화국 맞은 편 광희국민학교 옆 신당동 177번지 2(13)을 전세 50만환에 사용하면서 교회명칭을 새밭교회로 정하고 예배드리게 되었다. 새밭이라는 멋진 교회 이름은 공모를 통해 정해진 것인데, 곽영환 집사의 부인, 김영애 권사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영애 권사님은 교회 반주를 도맡고 초대 여신도회장을 역임한 분이다. 새밭이라 지은 이유는 교회의 신앙을 깊이 갈아서 옥토를 만들자는 의미에서였다. 이 이름에 대한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안희국 교수의 설교를 참조할 수 있다. 매우 깊이 있는 해석이 담겨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세아 10 : 12)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에레미야 4 : 3)

     

    저는 오늘 이 새밭교회의 새로운 출발에 즈음하여 우리교회의 이름을 설교제목으로 하고, 잠시 여러분과 함께 이 이름에 적응되는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교훈과 함께 우리의 결심과 결의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난 여름 새밭교회 1주년 기념 예배 때에 새밭교회 연혁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새밭교회라는 이름을 언제부터인지에 대하여는 잊었습니다마는 제가 이 새밭교회에서 처음 설교하던 그 주일에 저는 이 새밭교회라는 간판을 보고 참 이름이 참신하고 좋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좋다는 느낌을 첫째로 그것이 순 우리 나라 말로서 되어 있다는점, 둘째로는 새밭교회라는 명치의 내용이, 아마도 우리는 이제부터 새로운 땅에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리고 그것을 바꾸어 나가는 수고를 하리라는 새로운 결심과 결의에서 되어진 명칭일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고, 셋째로는, 제 생각에 그 이름은 정말 복음적인 의의를 가지는 이름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이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언제가는 그 이름으로 합당한 설교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오던 터에 지난 주일에 되어진 일을 계기로 오늘 이 이런 제목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우리 말 성경에는 직접 새밭이라는 이름으로 표시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에 해당한 새 땅이라던가 묵은 밭이러던가 옥토라던가 하는 말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우리교회의 이름을 두고 말하려는 내용에 적응하는 본문은 구약 호세야 1012절 말씀과 예레마야 43절의 말씀입니다. 호세야에는 너희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는 말씀이 있고, 에레미야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너희 묵은 땅을 갈아 엎으라.

    그런데 여기에 본문대로는 새밭과는 정 반대의 묵은 땅을 의미 즉 묵은 밭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원문은 묵은 땅으로 번역한 것이 아나라 묵은 밭이라고 한 말입니다. 즉 새로 개척하는 새땅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번역이나 일본어 번역에는 그 뜻이 분명합니다. 영어에는 Fallow Ground(신간지 또는 미개척지) Uncultivated Ground로 되어있고, 일본어 역에는 분명히 新田즉 새밭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여기에 묵은 땅은 이제까지 갈아오던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땅을 개척해서 가시덤불을 찍어 내고, 흙덩이를 깨트려서 부드럽게 한 후에 거기에다 씨를 뿌린 후 정성어리게 가꾸어워 가야 하는 그 땅을 의미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하는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동시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그런즉 호세아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묵은 밭을 갈아 엎어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실을 알기 위하여는 호세아의 본문의 말씀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호세아 10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밝기를 종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이 말씀은 문장으로는 시()이고, 내용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부터 겪어야할 수난의 과정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 있는 에브라임, 유다, 야곱 이란 이름은 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뜻입다. 좀더 구분해서 말하면 에브라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애칭이고, 야곱과 유다 라는 말은 이스라엘 이 남왕국, 북왕국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야곱은 북왕국을 말하고 유다는 남왕욱을 가리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이 11절의 본문에서 먼저 주목할 말씀은 에브라임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밝기를 좋아하나...”하는 부분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암소에 비해서 말하는 것인데, 이 암소는 곡식 밝기를 좋아하는 암소라고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곡식 밝기를 좋아하는암소라고 하는 말은 우리에게는 무엇을 뜻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지마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계는 실감이 가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세의 율법 조문 가운데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씨우지 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뜻인즉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들여서 타작을 할 때에 우리 나라 같으면 도리깨질을 하는 대신 잘 마른 밀 같은 것을 마당에 펴놓고 길들인 암소가 그것을 밟아서 떨어지게 했습니다. 마치 길들인 소가 밭이랑을 밟아 나가듯 이 곡식 펴놓은 마당을 차근 차근 밟아서 떨어지게 마련인데, 이 때에 그 곡식을 밟는 암소의 입에는 망을 씨워서 먹지 못하도록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충분하게 먹이라는 말이지요. 참으로 암소의 구실로서는 아주 평안한 일인 것입니다. 힘들이지 않고 슬금슬금 걸어가면서 먹을 것을 먹고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들인 암소는 자기가 하는 일 중에는 이 곡식 밟기를 제일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그 아래 문구를 살피십시다. “......내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그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우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이 말씀의 뜻은 위에 구절을 알고보면 쉽사리 이해될 줄 압니다.

    즉 경우는 달라져서 그 암소의 연한 목에는 사정없이 멍에가 메여지고, 그러나 그 위에 사랍을 태우게 되리라. 이렇게 되는 경우에 유다는 밭을 갈고 야곱은 흙덩이를 깨뜨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힘안들이고 슬슬 걸어 다니면서 먹을 것을 마음대로 먹게 되는 그러한 쉬운 생활을 하는 대신, 그 목에 멍에를 메고 묵은 밭을 갈아 엎어버리고, 그리고 그등에는 사람이 타고 이리 가라면 이리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로 가는 고역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2) 의를 심은즉 사랑의 열매를 거두리라.

    그런즉 왜 이 고역을 해야 하는가요? 한 마디로 묵은 밭을 갈아엎어버리고 그 흙덩이를 깨뜨려서 브드럽게 한 후 그 위에 씨를 뿌려서 곡식을 가꾸어 추수하는 일이 귀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문 12절 상반부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은즉 사랑의 열매를 거두리라.”는 말씀에 분명히 들어났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장래올 민족적인 이운을 앞두고, 너희들이 자난 날에는 마치 곡식 떨기를 좋아하는 길들인 암소처럼 가나안 복지에 살면서 종교생활에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나 또 농사하고 목축을 하는 생활에 있어서나 평안한 생활을 하고 지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더 한층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위대한 민족을 형성하기 위하여 고난의 멍에를 메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곡식 밝기를 좋아하는 암소에게 고역(苦役)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민족이 메는 고난의 멍에는 실로 메기 어려운 侵畧??의 멍에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앗수리야와 바벨론 이라는 강대한 국가에 침략을 당하여 국토가 망하고 민족이 사로잡혀가는 그러한 약소민족의 처참한 압박과 비애의 멍에를 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결코 불행과 절망을 가져오는 멍에는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소가 멘 멍에가 힘들기는 했지만 그 멍에를 멤으로 해서 새로운 묵은 땅이 밭으로 갈려지고 그 밭에 흙덩이를 끄는 수고를 통해서 씨앗이 뿌려지고, 씨앗이 뿌려지는 수고와 함께 김매고 가꾸어주는 수고를 통해서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의 조국을 잃고 자기의 본토에서 쫒겨나서 이방인의 압박 하에 고역을 했으나, 그 고역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감으로 인연해서 불안과 고민과 고역과 비애와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공의를 세계에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성은 이 고난의 멍에를 메고 세계 어느곳에서나 그곳에서 새밭을 개척하고, 그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그 결실을 만국민과 함께 거두어들이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예언자 호세야가 너희가 공의를 심은즉 사랑의 열매를 거두리라는 말씀은 그들의 이러한 고역을 통해서 개척하는 새로운 마음밭에 하나님의 진리(복음)의 씨앗을 파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기뻐하시어서 많은 사랑의 열매로서 저들의 뿌린 씨의 결실을 맺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십니다.

    예언자 호세야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묵은 밭을 갈아엎어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여기에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신다는 말씀은 너희가 새밭을 갈아 재치고 그 밭에 하나님의 말씀인 의의 종자를 충실하게 뿌리면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우로를 내리셔서 30배 혹은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2. 새밭을 갈라는 현실적 교훈

    저는 위에서 예언자 호세아가 말한 묵은 밭을 갈아엎으라는 의미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애기를 돌려서 새밭을 갈라는 현실적인 교훈을 배워 볼려고 합니다. 제가 말하는 현실적인 교훈은 두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 하나는 한국 교회는 새밭을 갈아엎으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새밭교회는 우리 교회의 이름에 합당한 새밭을 개간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1) 한국 교회는 새밭에 씨를 뿌려야 한다.

    우리 한국은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복음의 새밭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한국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올때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던 때 였던만큼 기독교가 서양에서 나온 종교라고 해서 금단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이란 땅에 뿌려진 그 무렵에 박해는 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한국은 밭으로 말하면 새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새밭이었다는 의미는 기성종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기성 종교인 불교나 유교나 도교 등이 당시에 있어서 어려가지 면으로 피곤했던 한국민족의 영혼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만한 종교로서의 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피흘리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한국이라는 새밭에 떨어져 단시일에 싹이나고 결실해서 세계 도 사상에 류례를 볼 수 없으리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제 우리 신교만 하더라도 70년의 역사를 마지하는 오늘에 기독교의 사정은 많이 변했습니다. 변했다고 하는 것은 이 한국이라는 복음의 터전은 옥토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역군들들의 무지와 부주의와 불성실로 인해서 지금은 그 밭에 잡초가 많이 성하는 묵은 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잡초는 여러 가지 종류입니다. 말하자면 교파사움, 교리싸움, 교권싸움, 교회당 쟁탈전, 교직자의 자리다툼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순수한 복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인 것이다. 따라서 이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지고, 교회의 빛은 어두워지고, 순진한 양들은 어느것이 바른 복음인지 몰라서 이리 밀리고 저리 쏠리는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이리하여 정말 예수를 바로 믿고 진실하게 살아보려는 사람은 교회생활에서 오히려 구역질을 느끼고 나가는 실정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밭을 갈아엎어서 순수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따라서 이 새밭을 개간하려고 하면 갈아엎으려는 멍에를 메어야 하고, 흙덩이를 정지하고 씨를 뿌리고 잡조를 뽑아 헤치는 고역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2) 새밭교회는 이름 그대로 새밭을 갈아야 한다.

    이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으로 저는 마지막으로 예언자 호세아가 묵은 밭을 경작하라는 교훈을 우리 새밭교회의 경우에 비추어 그 현실적인 교훈과 반성이 있기를 바라서 몇 말씀하겠습니다.

    요새 시중에는 새밭교회가 동부교회와 합하고, 또 중부교회까지 합쳐서 하나의 교회를 만든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정작 우리교회는 그 진상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나는 물론 교회의 합동이라는 원칙과 그 합동한다는 사실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우리의 믿음과 겸손과 성실로써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시는 은혜스런 원리를 따라서 하지 아니하고 단지 어떠한 체면이나 이해관계에서 되어지는 정치적인 흥정과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합동은 더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하는 이 말은 결코 하나되게하는 기회를 막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말하려는 것은 여러분은 이미 묵은 밭에서 여러분의 신앙 양심과 순수하고 아름다운 교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새로운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고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려는 것 뿐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여러분과 같이 고락을 등분한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여러분이 이 새밭교회를 이룩한 심정을 알 것같이 생각됩니다. 만일에 여러분께서 이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저는 꼭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새밭교회에 있어서의 교회 생활을 예언자 호세야가 말한 곡식 밝기를 좋아하는 길들인 암소의 위치에서 안전하게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다른 말로 하면 새밭을 갈아 엎으려고 하면 고역의 멍에를 메고 흙덩이를 깨뜨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 교회는 지난 주일에 이 새밭교회의 무거운 짐을 질머 지실 장로님들을 택했습니다. 전에도 그러 했지만 이로서 장로님들은 이제부터 새밭을 갈아엎으기 위하여 무거운 멍에를 메고 나선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사실과 함께 알아야 할 것은 밭을 갈아엎으려는 데는 멍에를 메는 일만으로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우선 가작답을 쥐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가작탑을 쥐는 분은 다름 아닌 책임을 지는 교역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작탑을 쥐는 이나 멍에를 메는 일만으로 새밭이 이룩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호세아의 말씀에 유다는 밭을 갈고 야곱은 흙덩이를 깨뜨리다는 말씀과 같이 제직과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걷어 내는 수고를 해서 비로서 새밭에는 새 싹이 힘있게 움돋아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교회에는 긴급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싶이 예배드리는 성전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찬송소리가 아닌 기계소리가 밑에서 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 한 사람도 이 수고를 담당하는 일에서 제외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는 새밭을 갈라이것은 엄숙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시기 때문입니다.

     

      13평짜리 작은 교회였고, 아래는 음식점이라 주일마다 음식냄새가 풍기던 곳이었지만, 초기 교인들의 뜨거운 신앙의 보금자리로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예배 처소를 구하자마자 신도들은 교회 신축의 희망을 품고 기금 마련에 착수했다

        4개월 후 19591111()에 서울운동장 뒤편 청계천 방면 신당동 217-5호에 역시 2(29)을 또 전세로 사용하게 되면서 교회 규모가 조금 커지게 되었다. 이 공간은 교인인 김갑실 권사의 아들이 운영하는 정신병원 건물이었다.

      그러던 중에 1962429일 신당동 247-7(당시 성동여자실업학교 맞은편) 2층에 다시 예배처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65년 행당동으로 교회 건물을 지어 들어가기까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임시 건물을 전전하면서 건축 기금을 마련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우던 시절이었다.

    교회의 체제는 19599, 그러니까 첫 예배를 드린 후 3개월 만에 안희국 교수(한국신학대학교)를 첫 설교자로 초빙하고 동부교회에서부터 함께 해온 김계성 여 전도사를 모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안희국 교수는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의 설립자인 송창근, 김재준 선생과 가까운 후배였고, 함경도가 고향인 기장 교회 선구 멤버로 활약했던 분이다. 평신도로서 농촌 목회에 힘을 쏟던 분이라 목사 안수를 받지는 않으셨지만, 당시 선구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분으로 초기 새밭교회 성도들의 성서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우리 새밭교회의 출발 당시의 신앙고백을 잘 지키도록 설교하고 지도해주셨다.


       

      ▲ 그림 3 1960. 6 창립 1주년 예배 후

     

    김계성 전도사는 돌아가실 때까지 새밭교회의 정신적 어머니로 교회를 이끄셨던 분이다. 역시 월남하신 분으로 깊은 신앙심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그분의 월남에 대한 간증이 659월에 발간된 학생회지 새밭열매에 실려 있는데 가히 그 신앙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북한에서 마르다신학을 졸업한 후 처음 받은 사명으로 함경남도 함흥 남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해서 새파란 청춘도 아낌없이 고이 바쳐 10여년 간 섬겨오던 주의 교회와 주의 양떼들을 악독한 공산당의 압력에 몰려 더 섬길 수 없어 울며 정처 없이 떠나는 나의 심정을 하나님은 아시건만 청산유수도 왜 말이 없으신고!

      오라는 데 없이 쫓기며 무거운 발을 옮기며 가야만 하는 나의 발걸음은 원한의 3.8선에 이르자 사방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놀라며 허둥지둥 위험한 골짜기에 빠질 때마다 오직 찾는이 주님! 주의 크신 보응으로, 3.8선을 무사히 넘어 한탄강에 도착한 나의 두 뺨에는 감사의 눈물이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내가 교역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길을 원하십니까? 정든 땅을 떠나 낯설은 이남 땅에 왔으니 나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남 땅에 와서 새 출발 할려고 하오니 주님의 원하시는 바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는 이 한탄강을 아니 건너겠으니 응답하여 주시옵소서하며 야곱이 얍복강 변에서 주의 축복을 받고야(32)그 강을 건넌 것같이 나도 주님의 응답받기 전까지는 이 강을 넘지 않기로 결심하고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비는 첫 날부터 계속 막 쏟아지는 강변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나의 태도는 죽음을 초월한 기도였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한탄강 변에 엎드려 4일째 되던 날 주님은 횐 옷을 입으시고 맨발로 나의 엎드린 머리맡에 나타나셔서 <너는 힘써 싸워서 내 양을 찾아다오>라고 말씀하시고는 주님 가신 곳이 없었다.

      그 부탁을 받고 곧 일어나니 4일째 오는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는 한탄강 변에는 나만 홀로 남았다.

      나는 다시 감사 기도를 드린다.

      “! 주님, 감사합니다. 얍복강에 엎드린 야곱에게는 천사를 보내셨건만 나에게는 주님 친히 오셨음을 내 어찌 감당하오리까? 야곱에게 축복하신 주님, 한탄강 변에 엎드린 나에게도 축복하여 주심 감사하오며,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시던 주님, 부족한 저에게도 부탁하심 감사합니다.”(21:15-17)

      기도 시작한 지 4일 만에 응답 받은 그날 곧 한탄강을 건너서 서울 와서 다시 교역에 봉직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그 부탁을 충성스럽게 못한 것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나 여생을 바쳐서 그 부탁을 받들어 양을 찾아 주께 바치겠다고 한탄강 변에서 약속한 연고로 내 이 직분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나는 교역에 쓰라린 아픔을 당할 때마다 교역을 그만둘 생각이 가끔 있었으나 한탄강 변에 주님의 그 부탁 때문에 감히 그만두지 못하였고 몸이 아파서 누웠다가도 주님의 그 부탁! 그 날 나타나셨던 그 모습이 눈에 나타나면 겁이 나고 황송하여서 오! 주님, ‘힘써 싸워서 주의 양을 찾으리다하고 박차고 일어나는 때가 있다.

      

       ▲ 그림 4 김계성 전도사님(1978.10)

      또 19601113일에는 조덕현 목사를 임시 당회장으로 모신 가운데, 정봉조, 정승호, 황재황, 안병건 네 분을 시무장로로 위임하고 한요한 집사를 교회 첫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비로소 새밭교회는 조직교회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처음부터 1963년 말까지, 교인을 돌보는 심방 등 목회는 김계성 전도사님과 정봉조 장로를 비롯한 장로들이 합심하여 진행하였다.

      이후로도 교회는 예배당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으로 정식 교역자를 모시지는 못하고 여러 임시목사와 당회장을 거쳤다. 처음 설교를 담당했던 안희국 교수가 195993일부터 196012월 말일까지 주일설교를 담당하셨고, 이후 안언약 임시목사가 196135일부터 19626월 말까지 임시 목사로 교역을 담당하셨다. 신삼희 목사도 임시 목사로 잠시 도움을 주셨다. 그 후에는 한 동안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다가 당시 건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던 정대위 목사를 196323일부터 196512월 말까지 임시당회장으로 모셔 주로 주일설교를 맡겼다. 이후 행당동에 꿈에 그리던 교회 건물을 짓고 목회가 안정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교회를 이끈 분은 김계성 전도사와 정봉조 장로를 비롯한 여러 장로들, 19641월부터 19662월까지 교역하셨던 김해철 전도사이다. (후에 김해철 전도사는 루터교로 교파를 옮겨 목사 안수를 받고 루터교대학교 총장을 여러 번 역임하는 등 루터교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한다.)

      이 때 번듯한 건물도 없이 지내면서도 새밭교회는 늘 이웃을 돌보는 교회로 자라났다. 해마다 일어나는 물난리에 꼬박꼬박 수재의연금을 마련하여 이웃을 도왔고, 여신도회에서는 성미를 모아 가난한 신학생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며 도왔다. 19629월 당회록을 보면 이란 지진 이재민 구제을 한 사실도 눈에 띈다. 무학보육원을 비롯한 어려운 이웃들의 시설을 돕는 일도 지속했다. 특히 여신도회에서는 헌신적으로 이웃을 위한 봉사와 헌금 활동을 전개했다. 김해철 전도사도 월급을 거의 어려운 신도들을 위해 쓴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 그림 5 1961년 10월 전교인 야외예배 시 어린이부 모습




      ▲ 그림 6 1961년 성탄절 특송, 왼쪽 첫 번째 당시 김홍기 집사, 맨 오른쪽 염초섬 집사






                                           ▲ 그림 7 1962년 8월 남양주 실촌교회 어린이부 봉사 


      ▲ 그림 8 1963년 6월 전교인 야외예배(종묘)





     

     ▲ 그림 9 1964년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 뒷줄 왼쪽 두번째 문동환 목사, 뒷줄 맨 오른쪽 김해철 전도사,
    한신대 기독교교육학과의 문동환 목사와 새밭의 인연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신당동 마지막 예배 처소는 좁은 예배당이었지만 3층 다락방을 당시 한국신학대학생들 네 명에게 생활공간으로 무료로 빌려주고 있었다그 공간은 창고 비슷하게 쓰던 공간이기도 해서 불우이웃을 도우려고 모아둔 성미도 보관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성미가 조금씩 없어지곤 했던 것이다김계성 전도사는 그러나 신학생들에게 전혀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김해철 전도사에게 슬쩍 물어보기만 했다몇 십 년 후에 김해철 전도사가 미국 방문길에 이미 저명한 사회복지학 교수로 활약하는 원로가 된 그 신학생 중 한 명을 다시 만났는데젊은 시절 새밭교회에서 배고파서 성미를 퍼 먹은 사람들이 자기들이었다고 털어놓더라는 것이다그때 새밭교회에서 신세를 지던 신학생들은 교수목사해외 선교사 등 모두 자기 분야에서 큰 인물이 되었다. 결국 새밭교회의 사랑이 가난한 신학생들을 하나님의 값진 일꾼으로 만든 셈이었다.

      또 이때의 새밭교회는 매우 활기차고 즐거운 공동체였다정식 교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로들이 중간중간 수요예배 강단을 맡기도 했는데예배 후 안병건 장로의 생활강좌가 이어지기도 했다연탄을 어떻게 가는지찌개를 어떻게 맛있게 끓이는지 같은 생활에 밀착된 이야기를 교회에서 나누곤 한 것이다.


     ▲ 그림 10 1965년 성경학교 모습(신당동 예배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교회에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서 활발한 교회활동을 벌였다교회에서도 전체적으로 청년들의 활동들을 밀어주었다지금 원로장로이신 김병현 장로님을 비롯한 청년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교인들의 집에서 나오는 폐품을 수거해서 팔아다 교회의 캐비닛과 거울 등을 마련하곤 했다또 당시 분위기에서는 어려웠던 등산캠프 등의 활동을 벌여 교회가 청년 문화를 선도했다그뿐 아니라 당시 기독교장로회가 활발하게 벌이던 교회교육 운동에 참가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독교 교육의 원리를 공부할 수 있었다그런 청년의 힘이 새밭교회의 발전에 기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이렇게 청년들이 활발하게 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교인들의 지지가 큰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당시 교회의 어른들은 청년들을 그저 가르치는 대상으로 삼지 않고 교회의 주체로 온전히 세웠다예배 인도도 맡기고 각종 사업의 실천자로 세우곤 했다.

      그런 가운데 교인들의 염원인 예배당 건립 준비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신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함께 했고 특히 김계성 전도사는 자택을 헌납하고 건축헌금에 앞장섰다행당동에 첫 예배당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은 안병건 장로가 정리한 글로 대신한다.


      2년여에 매월 적립금과 한 번의 ,특별 감사헌금과 또 교인의 건축할 땅 매입을 위한 특별헌금을 합해 총 4,500,000환에 달하였다.

      19602월에 동대문구 신설동(구 경마장이며, 6.25사변 당시에는 비행장으로 징발 사용하던 곳)에 대지 70평을 평당 30,000환씩 2,100,000환에 매입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 계획에 이 지대가 습지인 저지대이므로 약 3m 높이로 흙을 쌓아 높여 정지한 후 도로를 구획하고 각 지주간의 환지가 완료하기까지는 분할이나 건축이 허가되지 않아서 2년여 동안 기다리는 중에 교회위치로서는 경마장터 동쪽에 적당하고 또 땅값도 이 70평을 팔아서 140평을 살 수 있는 땅이 있어 그렇게 실행하였으니 실로 두 배의 평수가 되어 교회건축에도 적합한 부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교회 건축 부지는 조성되었으나 3년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축비용이 마련되지 못하여, 약간의 적립금으로는 건축을 시작할 수도 없고, 모든 계획이나 소망 사항이 여의치 안아 온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길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649월부터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하던 중에 19651월초에 건축의 가능성이 재기됨으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1965612일 신설동의 매입한 땅 140평을 2,100,000원에 팔아서, 그날로 성동구 행당동 311번에 173평의 대지와 40평의 기와 건물(건전지 공장으로 사용하던 곳)1,730,000원에 매입하기로 계약하였다.

      그간의 건축기금과 합하여 196571일 착공하여 교회당을 46평으로 수리 증개축함과 동시에 같은 땅 마당 한쪽에 사택 및 부속건물 20여 평을 900,000원에 신축하였다.

      1965731일에 신당동에서 행당동으로 이전하여, 19658월 첫 주일에 동부교회와 분리한 후 6년간이나 염원 갈망하던 우리의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들어주시는 산 증거를 체험하게 되니 우리는 비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을 가질 따름이다.

      (1965. 9, 안병건 장로 정리)

       

     6년의 세월, 염원하던 예배당을 갖게 된 신도들은 손수 의자를 짜 맞추고 다듬어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사랑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않고 신앙과 교육에 힘썼던 새밭의 가치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로써 새밭교회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658월 첫 주, 행당동에 첫 교회 건물을 짓고 정대위 목사를 모시고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렸다.




     

    ▲ 그림 10 행당동 교회 전경


    당시 창세기 28:10-22절로 본문을 삼아 전한 설교문이 아직 남아 있다.

      우리 교회가 오래 바라고 간구하던 새 성전을 건축하고 오늘 이렇게 처음 예배드리게 되니 감개무량하고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교우 여러분들의 성심과 끊임없는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감격과 기쁨 속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예배를 드리는 귀중한 곳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이제 축복에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성령이 계시는 곳이며 은혜의 기관입니다. 야곱이 부모와 집을 떠나서 망명을 가는 도상 광야에서 외롭게 돌베개를 하고 잘 때에 그는 큰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로다. 하나님의 문이로다.”하고 하나님이 자기 위에 계신 것을 자각하였습니다. 야곱과 같은 이러한 체험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즉 체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또 만나는 체험의 순간순간이 바로 귀한 믿음이 됩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을 만나기에 갈급한 심령의 소유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속에 편만하게 어디에나 계서서 그를 갈구하며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뵈옵는 체험이 실로 중요합니다. 이 체험을 받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시므온이 성전에서 봉사하고 의롭게 그리고 경건하게 생활하면서 성령의 지시와 위로를 받으며 메시아를 갈망하던 끝에 성전에서 아기예수를 안고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찬송하였습니다. 대 주재자시여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 이는 만민앞에 예비하신 것이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우리들 생애에 있어서 높고 귀한 순간이 주는 만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은 온 세상의 고통과 업보가 살아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치 일식 때에는 날이 캄캄하여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만이 중심을 이루고 죄악이 넘치는 세속적인 곳에는 태양이 사라진 밤과 같습니다. 우리들 행복의 새로운 때가 어떤 때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을 뵈옵는 경험을 가지는 때입니다. 저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의 친구가 되어 평생을 봉사하고 있는 슈바이쳐 박사의 생애의 기록 중에 보면 그가 19세 되던 여름방학 때에 부친이 목회하는 곳에 가서 지내는 중에 하루는 늦잠을 자다가 깨어보니 날은 맑고 명랑한데 뜰에 있는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서 아침 노래하는 그 새소리에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 엎디어 깊고 진지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큰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는 감격하여 하나님께 내 생애를 오직 주니만을 위하여 바치겠나이다. 주님이 뜻대로 쓰시옵소서.하고 그의 생애를 모두 하나님께 마키며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보는 체험을 가져본 일이 있습니까? 또한 어떠한 생애를 결정하여 본일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몸은 축복을 받아 건강하고 우리는 특별히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체험과 감격을 가질 것이며 어떠한 생애를 하나님 앞에 결정할 것인가 크게 생각하여 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깊이 체험하여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성전을 통하여 빛나는 생애를 이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자연 속이나 큰 폭풍 중에나 어디서든지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길에 폭풍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고통과 슬픔이 살아지고 희열과 감격이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옵시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오리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탄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특히 정한 시일과 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은 정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장소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집을 이렇게 짓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주일 날에에 두 번 주간 중 삼일에 한 번 성전을 찾아옵니다. 이 성전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중에 가장 귀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와서 기쁨으로 찬송하고 우리들의 소원을 아뢰는 일은 행복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만나보는 순간과 체험은 극적인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날 아침 야곱의 귀한 체험을 기록한 창세기 28장에서 이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 형 에서는 신앙적인 혈통과 장자의 명분과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소홀하게 생각하고 등한히 여겼으나, 동생 야곱은 귀중히 여겨 간구하던 나머지 축복과 장자의 명분을 빼앗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형 에서를 피하여 광야길을 홀로 걸어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매우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주신 그 대자연속에서 외로이 누워 자더니 밤중에 그곳에 사닥다리가 땅위에 서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으며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 이에 야곱은 급 깨어나서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뵈었다 이곳은 빈들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집이로다.하고 외쳤습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베개를 했던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 하는 뜻입니다. 그 성의 본 이름은 루스였다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큰 기쁨을 기념하여 거기에 돌단을 쌓고 큰 감격으로 자기 생애를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과 언약을 굳게 믿고 또 은총의 선고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힘차게 걸어서 밧단아람으로 갔습니다.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오셔서 야곱에게 약속하듯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축복과 약속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교회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충성을 통하여 목화자의 설교와 말씀의 강해를 통해서, 전도와 간증을 통해서 우리 교회에 오시고 우리들에게 접근하시어서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사랑하심과 긍휼하심과 선산 뜻으로 은총의 계약을 선포해 주실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힘도 부족하고 사랑도 결핍하고 명철과 지혜도 없으나 은총의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은총으로 덮어 주십니다. 실로 우리는 그의 은총에 감격하고 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에 모일 때마다 신뢰하고 순종하기면 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며 우리 지각에 뛰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과 축복을 하셨던 것과 같이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던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은총의 센타에 모여서 봉사와 봉헌을 충실히 수행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밖으로는 전도를 힘써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이 전에 가득차게 채워서 사랑의 센타를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들의 생활의 중심의 전을 이루기 바랍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어디에나 충일하시니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감금하는 오류를 범하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 성도는 사랑과 봉사의 계약을 충실히 수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 전에 충만하게 하고 존귀와 은혜가 가득하게 하고 그리고 능력의 역사가 계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충실히 예배하는 곳이며 예배와 찬송과 형제우애로 우리들의 생활을 삼는 중심이 되는 기관입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빛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 벧엘이요 하늘의 문이 될 것입니다. 이 아침에 나는 공야같은 흑암의 이 땅에서 빛나는 구원의 성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새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 후 정식으로 헌당식을 드렸다. 196595일의 일이다. 그때의 순서지가 남아있다. 임시당회장이던 정대위 목사가 사회를 보고 여러 교역자 등을 불러 성대하게 치러졌다.


     

     

     

     


      196510월 당회에서는 조종협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했다. 66220일에 목사 위임식을 가짐으로써 새밭교회는 처음 정식으로 담임 목회자를 모시게 되었다. 교인들은 조종협 목사를 매우 조용하고 깔끔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교회에 큰 변화가 있진 않았지만, 그간의 활발한 구제활동은 지속되었다. 초기 새밭교회의 교회적 사명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정례적 세례식, 교회 신도회와 교회학교, 성가대 등 조직, 야외활동 등 사업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 그림 15 조종협 목사 위임식에서 사회를 보는 정봉조 장로


    ▲ 그림 16 조정협 목사 위임식 및 주수겸 장로 취임식 (왼쪽 두 번째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 목사가 보인다.

     새밭과 한신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 그림17 1970년 1월 주일 예배에서 설교하는 조종협 목사


    ▲ 그림 18 1967년 당회원들(앞줄 왼쪽부터 정봉조 장로, 조종협 목사, 이동섭 목사, 뒷줄 왼쪽부터 박승남 장로, 안병건 장로, 안인길 장로)


     ▲ 그림 19 1972년 6월 11일 장로 위임식 후 (앞줄 맨 왼쪽 초대 설교자 안희국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이 시기에 기억해야 할 일은 교회 묘지를 마련한 일이다. 교회를 설립한 1세대들의 연배가 연로해진 것이 교회 묘지 부지를 마련한 당면한 이유였으나, 교회가 신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후로 지금까지 교회 신도들이 어버이들을 교회 묘지에 모시며 신앙공동체의 특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동양의 문화에 맞게 교회의 가치를 접목한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9689월 당회에서 경기도 안성군의 땅을 사서 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대지 비용이 11만원이었는데, 정봉조, 장동근, 주서분, 한요한, 이경온, 안병건, 김갑실, 김해룡, 황병숙 성도가 도합 13만원을 헌금하여 대지를 확보하였다. 이후 땅의 일부가 보호림으로 설정된 것을 알고 다시 근방의 땅으로 대체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쳐 19704월 교회묘지 등록을 완료하고 기초적인 규정을 마련하여 활용하게 되었다.

      또 이 시기, 1970년도에 김계성 전도사가 헌납한 집값의 일부로 신학생을 지원하는 김계성 장학금이 신설되었다. 김계성 전도사께서는 당시 거주하시던 회기동 자택을 교회 신축과 장학금 개설을 위해 헌납하셨다. 김계성 전도사의 요청은 한신대 장학생을 위한 김계성 장학회를 설치할 것과 헌금을 교회가 책임지라는 것이었고, 전세금과 일부 생활비를 부탁하셨다. 이에 교회는 920일 주일 예배에 헌납식을 열어 감사를 표했다. 그 후 실제 가옥이 매각된 것은 1973년도 10월이었고, 특별 회계로 처리된 이 헌금으로 많은 목회 후보생들이 그 혜택을 받고 성장했다. 또 그 헌금은 후에 교회를 건립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김전도사는 그전부터 본인의 월세 수입으로 매년 40명의 신학생들을 지원했다. 이 때 대학 과정 전체를 지원받아 목회자로 성장한 사람이 상암 목양교회 이청산 목사이다. 온 생애를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고 자신의 유일한 재산마저 교회를 위해 헌납하신 김계성 전도사의 신앙을 우리 교회는 잊을 수 없다.

    19717월 조종협 목사가 사임하고 박동화 목사가 임시 설교목사로 결정되었다. 그 후 박동화 목사는 1973610일 위임식을 가지고 새밭교회의 제2대 담임 목회자로 시무했다. 육군 군종 중령 출신이었던 박동화 목사는 교회 행정과 조직화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당시가 박정희 군부정권시절이라 군 인맥이 강했던 박목사의 경쟁력이 교회 운영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 교회의 체계가 정교해지고 뿌리 내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당대 교인들은 기억한다.

     

     ▲ 그림 20 박동화 목사 위임 안내


    ▲ 그림 21 1973년 7월 박동화 목사님과 교회학교 교사 기념 사진(앞줄 왼쪽 세번째 염초섬 집사, 네번째 김계성 전도사, 그 오른쪽 박동화 목사)


      이 시기에 청년부가 더욱 활성화되고 더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의 목적이기도 했던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끼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청년들이 여름철에 주변 빈민가를 돌면서 화장실 소독작업을 한 것이 교인들이 기억하는 즐거운 사역 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행당동, 응봉동 일대가 커다란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변모했지만, 당시만 해도 언덕 위로 끝없이 계단과 좁은 임시 가옥이 얽혀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하나였다. 인근 노인들을 어버이주일에 모시기도 하고, 교회 내 체육시설(탁구대 등)을 마련하기도 하면서 지역 사람들이 성도로 등록하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밖에 신학생에 대한 지원도 계속 되었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 활동도 더욱 열심히 감당해내었다. 1974년 성탄절에 교회 인근에 사는 신문배달부와 버스안내양의 위로잔치를 벌였다는 사실 등이 눈에 띈다.

     

                                                     ▲ 그림 22 1975 1월 양로원 봉사 후


      또 어린이부와 중고등부가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이다. 이렇다 할 학생 문화가 없던 시절이라 이 시기의 교회학교는 지금의 교회학교보다 훨씬 더 많은 학생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하는 은혜로운 공간이었다. 제직회의록을 보면 1973년 여름 어린이교회학교 학생수가 140명에서 180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였다.


     

     ▲ 그림23 1973년 7월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


                                                      ▲ 그림 24 1976년 8월 중고등부 수련회


     

    ▲ 그림 25 1975년 11월 문학의 밤


      이렇게 교회학교가 잘 되고 강조된 배경에는 우리 교단 문동환 목사의 영향도 컸다. 기독교장로회의 신학을 책임졌던 한신대학교의 특징 중 하나는 기독교교육학과가 전문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기독교교육의 핵심 이론과 실천 문제를 담당하던 분이 문동환 목사셨고, 이 분의 교회교육에 대한 열정이 우리 새밭교회에도 전해져서 교회학교가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학교를 담당했던 성도들의 기억에서 문동환 목사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문화적으로 열악했던 우리나라 상황에서 선진적인 유소년 문화를 교회가 담당할 수 있었던 점도 큰 요인이 되었다.

      신앙적으로는 여러 신앙 강좌와 교회 내 조직을 통해 점차 교회가 성장해 나가는 시기였다. 특히 신앙강좌는 신흥 종교 비판’, ‘한국 선교 100주년을 향하여 도전하는 기독교등 다양한 주제로 성도들의 지혜의 샘이 되었다. 이는 신앙의 지적 성찰을 강조하는 우리 교단의 장점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시작된 청년부 주관의 신학강좌8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우리 교회에 수준 높은 신앙의 지혜를 전해주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 사이 1975916, 정봉조 장로가 소천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정봉조 장로는 새밭교회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의 경제, 치리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였고, 교회 건축, 교회 묘지 장만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청년들을 늘 집으로 불러 대접하고 신도들의 여러 사정을 살피는 분이었다. 정봉조 장로는 완성된 새밭교회 체계라는 선물을 후배 교인들에게 남겨주고 가셨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유산으로 교회에 헌금을 남기셔서 새 성전 건축에 도움을 주셨다. 정장로의 유해는 교회 묘지에 모셨다.

     

     ▲ 그림 26 정봉조 장로 교회장


    그 이후에도 새밭교회의 순조로운 흐름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다소 갑작스레 박동화 목사가 19772월 사의를 표하게 된다. 당시 박동화 목사의 사의는 상당히 의외였고 교인들로서는 아쉬운 대목이었지만, 경동교회의 부목사로 가시게 되는 것을 축하해주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경동교회는 당시 교단의 큰 어른인 강원룡 목사가 시무하고 그 예배당을 건축가 김근수가 설계한 기독교장로회의 대표 교회였기 때문이다.

      박동화 목사 퇴임 즈음에 교회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6년여의 기도 끝에 마련한 행당동 예배당 부지 일부가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정부에 수용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새밭교회는 새로운 교회부지를 물색하고 새 예배당을 마련해야 했다. 이 일은 후임 목사의 몫으로 남겨졌다.

      기억할 만한 사실은 교회를 이전하면서 유초등부 어린이들을 이웃한 예장 천성교회에 병합시켜주고 떠난 사실이다. 그전에도 신당동에서 행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이웃 교회에 부탁하고 온 적이 있다. 교회에서 책임지던 어린이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에서 지역을 책임지는 새밭교회의 진심어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행당동 교회 시대는 새밭교회가 첫 예배당을 얻어 조직화를 마무리하고 신앙의 깊이를 마련하기 위해 나아간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후임 3대 담임 목사의 초빙은 신속히 결정되었다. 3개월간의 기도 중에 19777월 경북노회에서 시무하던 김성환 목사를 모시기로 하고, 그해 1113일 위임식을 가졌다. 김성환 목사는 1978년 새해의 목표로 1) 성전 건축 2) 열심 전도 3) 열심으로 모이는 일 4) 뜨거운 기도 생활을 들었다. 역대 교역자 중 가장 보수적 신앙, 원칙적 신앙을 강조했던 김성환 목사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김성환 목사는 활발히 부흥회를 열고 늘 금식기도 하면서, 또 청렴한 목사로서 새밭교회 안에 뜨거운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때 성도들은 신실한 신앙의 훈련, 신앙의 원칙에 대해 제대로 교육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시기는 예배당이 부재한 가운데 새밭교회의 틀을 지켜나간 힘든 시기였다. 구의동 별장으로 쓰던 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짓기까지, 처음에는 교회가 철거된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렸으며, 그 후에는 매입한 별장집의 좁은 공간에서 예배 드려야 했다. 이런 가운데도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교회를 지켜나간 선배 교인들의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

     

     ▲ 그림 27 당시 구입한 교회 부지에 있던 건물을 예배당으로 활용


     ▲ 그림 28 1978 6월 창립 19주년 예배 후

     

    ▲ 그림 29 1980년 12월 문학의 밤


      교회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김성환 목사는 본인이 취임시 많은 건축 헌금을 하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축 과정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1981329일 교회를 사퇴하게 되었다. 교인들은 그분의 깊은 신앙을 높이 사 유임을 권했으나 본인의 고사로 여의치 못했다.

    새 예배당 건축을 마무리한 사람은 이영일 목사였다. 이목사는 1981714일 부임하여 교회를 이끌었다. 한동안 별장 집에서 분위기 있게 예배드릴 수 있던 때였다. 새밭교회는 1982421일 지금의 예배당 건축을 위한 본격적인 시공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여가 넘는 공사과정 동안 구의동 교회 터에 천막을 짓고 예배 드려야 했다. 그러다 교회 터에 건축을 시작했을 때는 광문고등공민학교의 콘센트 건물을 빌려 예배 드렸고, 나중에는 교회 부지 근처 건물 지하 방, 교회의 내부 공사를 시작했을 때는 교회 지하 등에서 예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은 다소 정체되고 우여곡절을 겪던 건축 사업을 제 궤도에 올려놓고 무리 없이 마칠 수 있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장상준 건축위원장이다. 교회 건축 후에, 불행히도 장집사 내외는 1983년에 있었던 KAL기 피격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서 캐나다 앵커리지를 경유해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영공을 넘어가게 되는데, 이를 소련 공군이 민간항공기임을 알고도 격추시킨 사건이었다. 이 일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여러 국적의 승객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 중에 장상준 집사 내외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큰 일꾼을 잃은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림 30 교회 건축 현장에서, 이영일 목사와 새밭 권사 일동


    ▲ 그림 31 구의동 예배당 착공예식 모습

    후에 1982년 추수감사절에 감사예배 겸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신당동 시대, 행당동 시대를 거쳐 구의동 시대의 본격적인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헌당식은 김병현 장로 임직식과 더불어 19834월에 실시했다.

     

                                   ▲ 그림 32 1983년 헌당식 때 장상준 집사를 포함한 건축 공로자를 표창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억압적이고 불안한 시대였다. 80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유혈진압하고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공안통치가 우리나라를 억누르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박정희의 유신정권 이래 민초들이 부의 불평등, 정치적 부자유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영일 목사는 이런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예언자적 소명을 강조하는 목회자였다. 새밭교회는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기장의 정신을 실현하여 지역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사업은 19845월부터 시작한 새밭지역사회학교와 어린이 선교원(유치원) 사업이었다. 18세 이상의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일종의 야학 개념이었던 새밭지역사회학교에는 다수의 청년들이 교사로 참가하여 사회선교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해 내었다. 당시 입학금은 1,000원이었고, 수업료는 면제였다.


     

     

    ▲ 그림 33 1985년 새밭지역사회학교 입학식 후


    또 어린이선교원은 당시 아직 유치원의 위상이 정립되지 못한 시대 상황에서, 그리스도 정신의 보급과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무대로서의 새밭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전도와 선교에 큰 공헌을 했다.

      이 과정에서 교역자들이 당시 권위적 정부에 의해 구속을 당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빛과 소금으로 기능하려는 교회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시기였다. 1985106일 퇴임하기까지 이영일 목사는 단호하고 깨끗한 목회로 어두운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갔다.

      

     ▲ 그림 34 1985년 10월추수감사예배(초기 임시당회장이던 정대위 목사님 모시고)


     ▲ 그림 35 1985년 5월 전교인 야외예배


      행당동 예배당을 헐고 다시 구의동에 새 성전을 얻어 활동하던 구의동 초기 시절은 이후 성숙해질 교회의 초석을 다지고 교회가 나가야 할 신앙의 방향, 사회선교의 모범을 정립했던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1986년에 김복기 목사가 새밭교회의 다섯 번째 담임 목사로 취임하였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취임한 만큼 교회의 조직화와 발전에 열정을 더하는 활동을 보였다. 우선 8612월에 연속적으로 열린 정책 당회를 통해 교회의 조직을 실질적이고도 발전 가능하게 개편했다. 신도회를 연령 별로 구성하여 세밀하게 짰고, 실행부서 차원의 집행 단위도 에서 실행위원회체제로 발전시켰다. 또 구역도 더 촘촘하게 지역 단위로 묶었다. 이로써 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교회의 체계를 잡아나가면서 장로, 권사를 기독교장로회 헌법에 규정된 대로 신도들의 투표로 뽑기 시작하셨다. 이후로 우리 교회는 장로를 선출하기 전에 충분한 기간을 두고 전교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에 선출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교회의 조직이 더욱 탄탄해지게 되었다.



    ▲ 1986년 6월 8일 창립 27주년 김복기 목사 취임


      이 때 결정한 중요한 교회의 비전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교회로서 교회 전체 예산액의 1/10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 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듯이 우리 교회의 예산 10%를 어려운 교회, 이웃을 위해 쓰기로 한 것이다. 1989년에는 절기헌금 전액을 대외 선교비로 사용하기로 결의하면서 이웃과의 나눔은 더욱 커져 나갔다. 이 비용으로 우리 교회는 주변의 어려운 교회와 이웃을 지원해 오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개척하는 교회의 자립을 위해 지원금을 보내고, 절기에 따라 경로잔치를 벌였다. 특히 1987년에는 전교인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우리 교회는 수재민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수련회를 취소하고, 수련회 예산을 수재특별헌금과 합해서 수해지역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교회 주변에 사시는 독거노인과 장애인들, 어려움을 겪는 다른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지역 경로 잔치를 동사무소와 연계하여 교회가 진행하기도 했다.


    ▲ 1994년 4월 구의 2동 경로잔치


       돌산교회를 후원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19844월에 우리 교회에서 시작했던 지역사회학교 활동은 1989년에 삼양동에 있는 지역사회 선교센터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구의동이 개발이 되면서 야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고, 그 노력과 비용을 더 시급한 지역을 돕는데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선교센터를 발전시켜 교회로 독립시키기로 하고 1990년에는 삼양동에 돌산교회를 설립하여 창립예배를 드렸다. 이는 1989년 창립 30주년을 맞은 교회의 성숙한 결단이기도 했다. 돌산교회를 후원하기 위한 선교후원회를 조직하면서 1997년까지 돌산교회 자립과 공부방 마련 등을 위하여 지속적인 후원과 교류를 계속해왔다. 어린이선교원은 시설과 인적 자원이 허락하는 동안 몇 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교회의 여러 쓸모를 위해 사업을 접게 되었지만 이후 교육부서의 강화로 이어졌다.


    ▲ 1988년 2월 어린이선교원 졸업식


        1997년부터는 장애우 재활선교를 시작하면서 교회 뒤편에 자리 잡은 정립회관과 연계하여 장애인들이 작업공간으로 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점심과 차비를 지원했다. 우리 교회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도 이 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또 2004년부터는 안산 예수가정 사업에 동참하여 새밭토끼풀가정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안산 예수가정 사업은 새밭교회 부목사로 계시던 김현수 목사가 자신이 개척한 안산노동교회로 찾아든 가출 청소년들을 돌보면서 시작된 사업이다. 김현수 목사는 아이들을 거두어 하나의 가정을 이루며 보살피기 시작했고, 연대하는 사람이나 조직의 도움을 받아 그런 청소년 가정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새밭교회가 동참하여 하나의 청소년 가정을 꾸려 돕기 시작한 것이 새밭토끼풀가정이다. 이 사업은 새밭토끼풀가정의 아이들이 성장하여 가정 구성이 종료된 2018년까지 지속되었다


    ▲돌산교회, 안산노동자교회 선교 등을 성찰해보는 창립 35주년 특강 (특강자는 안산 노동자교회 김현수 목사)


      교회의 미래 일꾼을 키우는 장학금 지급이 좀더 체계화된 것도 이 시기이다. 교회는 장학위원회를 구성하고 장학금 규모를 키워 정기적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아울러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미래세대를 키우는 전통은 이렇게 이어졌다.

      1987년도 미루어진 전교인 수련회는 1988년도에 준비하여 가게 되었다. 그해 728()~30()까지 교육위원회가 주관하여 남양주군 수자원농장에서 개최된 수련회에는 어린이를 포함하여 190명 정도의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하여 새밭의 중흥을 이루는 힘을 얻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9년에는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강조하며, 성서에서 본 가정의 기초, 가정윤리, 행복한 가정 만들기 등에 대한, ‘가정문제 신앙강좌를 모두 5회에 걸쳐 진행했다. 신앙교육이란 교회에서뿐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의 실천이 중요하다. 그리고 각 가정이 올바른 믿음으로 바로 설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와 나라의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1993년에는 평신도교회학교를 시작했고, 1997년에는 장년부와 청장년부로 나누어 제자훈련을 시작하면서 신앙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이 정례화 되었다

      1992년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만들어주신 자연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잘 가꾸고 지키지 못해서 생긴 환경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요즘은 어디서나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환경문제를 해결해야 인간이 잘 살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일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 8절지 크기의 빳빳한 종이에 빼곡히 적힌 창조세계 회복 수칙을 전교인들에게 나눠주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건강하게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말씀으로 성장하는 교회라는, 1990년 우리 교회의 신앙표어처럼, 19901월부터는 주일 오전예배를 9, 112부로 나누어 드리기 시작했고, 19943월부터는 주일 아침 7시 예배를 시작하여, 주일 오전 예배를 3부로 나누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7시 예배를 통해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일성수와 예배의 가치를 강조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였다. 예배의 순서는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교회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으면서 예배 공간과 교육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오랜 기도 끝에 200012월에 주차장 부지였던 곳에 지하 1, 지상 3층의 신관 건축을 결의했다. 지하에는 추자창도 마련하여 교회의 편의를 도모했다. 인간적인 계획은 거기까지였으나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놀라웠다.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기도로 하나님은 신관 건축을 진행하던 중에, 계획했던 신관 건축 완공뿐 아니라 2001년에 본관 증축 공사까지 마치고 입당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강대상 앞쪽으로 바짝 붙어 있던 전면을 뒤로 밀면서 설교와 찬양 공간이 더 넉넉하게 되었고, 예배 의자도 전면 교체하여 더욱 좋은 환경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 신관 건축은 좀 더 편하게 예배를 드리자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노약자들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가 필요했고, 새밭교회의 미래를 짊어질 미래세대를 위해 교육 공간을 확충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기에 하나님이 크게 채워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본관 증축 및 신관 건축 경과보고

    1. 건축준비 과정

    1) ‘00.10.04. : 현 주차장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신관을 짓기로 결의하다.

    2) ‘00.11.20. : 설계착수-()하원포럼 건축사 사무소(소장-김영수)

    3) ‘00.12.29. : 신관건축허가 완료(건평225.48, 지하1층 지상 3)

    4) ‘00.11.19. : 건축위원회 구성 및 임원선출(심재근 위원장 외 26)

    2. 건축진행 과정

    1) ‘01. 2.11. : 대륙건설을 시공업체로 선정하다.

    2) ‘01. 2.19. : 계약체결-총공사비-810,000,000

    3) ’01. 2.25. : 기공예배를 드리다.

    4) ‘01. 3.17. : 건축헌금 약정(목표액 5억원)-71천만원 약정.

    5) ‘01. 8. 5. : 본당 증축과 내부 인테리어공사를 결의하다.

    6) ‘01.12.29 : 입당예배드리다.(신관 건축, 본관 증축 및 인테리어 공사, 사찰관 신축, 신관 옥상 부목사관 신축)

    7) ‘02. 5.10. : 준공검사 필하다.

    8) ‘02. 6. 9. : 헌당예배 드리다.

    3. 공사비 내역

    1) 신관건축공사비 : 870,000,000(810,000,000+60,000,000)

    2) 본관증축공사비 : 286,000,000

    3) 인테리어공사비 : 211,000,000

    4) 각종부대공사비 : 63,500,000

    5) 각종설계용역비 : 50,000,000

    6) 비품비 구입비 : 203,800,000

    : 1,685,000,000

    4. 건물 현황

    1) 대 지 : 1105.3(365.39)

    2) 연건평 : 본관 및 신관 : 672


     ▲ 2001년 2월 25일 신관건축 기공예배 후 기공식

       

      2000년 초반부터는 지역사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의력교실을 시작했다. 어린이들의 창의력 발달을 기본으로 해서 영어놀이, 예스셈, 종이접기, 창의력 독서논술, 초등시사, 정서놀이, 놀이치료, 동화와 함께하는 창의력교실, 미술놀이, 워쉽 댄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교회 주변 지역 어린이들의 교육과 선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뿐 아니라 간간히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창의력 어머니교실이 개설되어 자녀들의 미디어 사용에 대하여 어머니들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졌고,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어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교회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지역주민들과 화합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창의력교실1981년 개원했던 새밭 어린이 선교원’, 1984년에 시작했던 지역사회학교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부터는 나를 새롭게,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라는 표어 아래 새밭교회 5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들이 계획되었다. 그동안 새밭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나누고자, 창립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해외 선교를 시작했다. 첫 해외 선교지는 캄보디아로 정해졌고 그곳에 현지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했다. 20083월에 드디어 캄보디아에 크메르 사랑의 교회를 완공하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크메르 사랑의 교회는 우리 교회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성숙한 교회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뜻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살아계심을 증거한 일이다. 크메르 사랑의 교회는 우리 교인들의 헌신적인 참여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되었다.


     ▲2008년 3월 크메르루즈 사랑의 교회 헌당 예배 후


    <‘크메르사랑의교회건축 현황>

     

    1. 사업의 목적

    새밭교회가 창립50주년을 기념하여 성숙한 교회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뜻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 캄보디아 캄포트 지역 농촌에 교회당을 건축하여 현지 교회에 증여한다.

     

    2. 사업추진 원칙

    1) 교회당 건축에 필요한 대지는 현지인들이 준비한다.

    2) 교회당 건축에 필요한 경비일체는 새밭교회가 부담한다.

    3) 교회당 권축사업의 추진은 한국기독교장로회 파송 선교사인 김형기 목사의 책임으로 한다.

    4) 건축후 교회당 재산(대지 소유권을 포함)은 김형기 선교사가 세운 법인에서 신탁 관리한다.

    3. 사업추진을 위한 재정계획

    1) 건축에 관련된 예산

    - 건축허가 및 준비비 900$

    - 성구 및 내부 장식비 800$

    - 감독 및 관리비 1,200$

    - 건축비 14,700$

    - 등록 및 취득세 1,500$

    19,100$

    2) 헌당예배 진행에 관련된 예산
    - 헌당식 잔치비용 500,000

    - 참석자 공동비용 500,000

    - 담임목사 출장비 950,000

    1,950,000

    3) 건축비와 일체 비용을 새밭교회 2007년에 권사임직자들이 낸 기념감사헌금으로 충당한다.


    4. 준공검사 참석자

    강갑주 김난주 김백규 김복기 김승자 김영애 김우경 김의숙 김종진 노란순

    박정희 박준상 박찬균 박찬영 배성호 백동희 심순선 이안순 조성자


    5. 추후 과제

    1) 크메르 사랑의 교회 지원계획에 관한 건

    2) 캄보디아 선교사업(김형기 선교사) 지원에 관한 건

    6. 별첨

    1) 선교단 캄보디아 방문 일정표 : 2008330()-43()-45

    2) 헌당예배 순서 : (진행-소사리 목사, 기도-심순선 장로, 성경봉독-김우경 권사, 설교-김복기 목사, 봉헌기도-배성호 장로, 헌금기도-박준상 장로).

         새밭교회 창립5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캄보디아 선교는 우리 교회가 50년의 역사를 세계 선교의 비전으로 실현시킨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하겠다.

      이처럼 김복기 목사가 새밭교회에 재직하시는 동안은 새밭교회가 내실을 기반으로 대외 사업을 확장해간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지역 사회에 봉사와 헌신으로 공헌하는 교회의 상을 정립하는 과제를 안은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과제는 이제 새로운 준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20091122일 목익수 목사가 취임하면서 구의동 시대의 새로운 막이 시작되었다. 40대 초반의 나이로 목회를 시작했으니 김복기 목사에 이어 젊은 목회자가 새밭을 이끌게 되었다. 목목사의 교회 목회 비전은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표어에 집약되어 있다. 그에 대한 상세한 안내는, 실질적으로 목목사의 목회가 시작된 2010년을 여는 첫 주일(13) 주보에 실려 있다.

    1) 우리 새밭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를 꿈꿉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의 말씀처럼 생명살림이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역인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우리 새밭교회도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우리 교회의 첫 번째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외국교회 선교사님들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이제는 그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주님의 복음이 필요한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선교에도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또한 삶에 지치고 소외도어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세계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돌보고 지키는 사명까지 감당하는 건강한 신앙공동체 됨이 우리 교회의 첫 번째 비전입니다.


    2) 우리 새밭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교회를 꿈꿉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지어다”(마태복음 2819~20) 우리 새밭교회는 위의 말씀을 우리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절대 명령임을 기억하여 이 땅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이 땅에 주님을 닮은 제자들과 하나님의 선한 일꾼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건강한 성도가 건강한 교회를 만들고 건강한 교회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감을 기억하여, 철저한 신앙과 기독교 가치관으로 다음 세대를 양육하여 하나님의 꿈을 이어갈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들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또한 어른 세대도 철저한 신앙훈련을 통하여 깊은 영성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헌신적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도록 양육하며 돌보는 일이 우리 교회의 두 번째 비전입니다.

    새밭교회를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지역기반 선교를 강화했다.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전교인 봉사활동인 <지저스데이>가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교회 주변의 쓰레기를 주우며 청소하고, 인근 노인정 등 평소에 대청소가 어려운 곳에 방문하여 대청소를 실시했다. 교인 중에 인테리어, 건축 등에 종사하는 분들은 담당 구청 등의 도움을 받아 특별히 어려운 집을 추천받아 주택 리모델링을 실시했다. 그리고 교회 근처에 있는 어린이 그룹홈 등 복지기관을 방문하여 여러 어려움을 나누고 헌금과 헌물을 전했다. 유치부 꼬맹이부터 노권사님들에 이르기까지 전교인이 지역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2년부터는 배우로 활약 중인 이상우 형제가 팬들로부터 받은 사랑의 쌀’ 200 킬로를 나누는 자선도 덧붙여졌다. 지저스데이는 그동안 여러 방법의 지역선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애쓴 새밭교회의 전통을 이어가는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 그림 42 2016년 11월 지저스데이 구룡마을 연탄배달 봉사


     ▲ 그림43 지저스데이에 어려운 이웃의 주택 리모델링 하는 모습


    <어메이징 터치 영성 훈련>도 생명 살리기 비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국 시애틀 형제교회(권준 목사 시무)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심도 있는 봉사를 통해 참여자들은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고, 봉사자들은 참여자의 변화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하는 프로그램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참여자에게 집중하는 내용으로, 시애틀 형제교회에서 성과를 거둔 프로그램을 우리 교회에 접목해보았고, 우리 교회 외에도 동수원교회 등 우리 교단 내 여러 교회로 모범 사례가 확산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또 온누리 교회에서 시작된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등을 도입하여 가부장 시대 왜곡된 부모상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바른 모습으로 회복하는 일도 시작되었다. 우리 교회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새로운 부모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그림 44 2011년 5월 제 1회 어메이징 터치


    해외의 생명을 살기기 위한 선교 사업도 더욱 박차를 가했다. 창립 50주년을 맞아 캄보디아에 건축한 크메르 사랑의 교회(2014년 새밭 축 교회로 명칭 변경)에 이어 2010년에 캄폿 지역에 제2의 개척교회를 건립했다. 크메르와 캄폿에 건축한 교회당은 현지 교회에 증여해 캄보디아 선교의 기틀이 되도록 했다. 이후 단기 선교를 통해 교회 건물을 보수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등, 지속적인 관심과 헌신을 더했다. 더불어 캄보디아에 우물을 만들어주는 사업에도 많은 교인들이 참가하여 선교의 지평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 그림 45 2010년 5월 캄폿 새밭교회 헌당식


    2013년에는 미얀마로 선교 지역을 확장했다. 그해 8월 공동의회를 거쳐 미얀마에 해외교회를 건축하기로 하고 부지를 물색하며 기도로 준비했다. 그런 노력 끝에 다음해인 20142월에 미얀마 다공에 새밭 다공센터를 세우며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기존의 캄보디아 교회들과 다른 점은 선교의 모든 과정을 우리 교회가 주체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 교회들은 이전부터 활동하던 조직화된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그 관리를 맡겼다면, 이번에는 부지 선정부터 건축까지 우리 교회가 책임지고 선교사의 파견까지 책임졌다. 이로써 선교의 역량을 훨씬 높일 수 있었다. 현재 미얀마 다공센터는 미얀마의 국가 특성 상 교회의 이름을 내세우지는 못하지만 어느 해외 선교 교회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예배하고 자체 선교를 진행하는 그리스도 공동체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 그림 46 2014년 2월 미얀마 다공새밭센터 헌당예배


     ▲ 그림 47 2017년 1월 미얀마 새밭다공센터 모습

     

    새밭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실천은 교육부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목익수 목사 취임 후 신관에 있던 구 목사관을 교육실로 활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로써 교회 신관은 오롯이 교육부서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구 목사관은 먼저 새밭 방과후 교실’(처음 이름은 행복을 배우는 교실’)로 활용되었다. 교인의 자녀 뿐 아니라 지역에서 공부방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모집해 필요한 과목을 가르쳤다. 교과 전문성을 가진 교인들이 자원봉사로 교사 역할을 감당했다. 이 사업은 후에 새밭 토요방과후교실로 변경되어 실시되다가 지역의 수요가 없어 마무리하게 될 때까지 지역에 공헌한 사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새밭 방과후 교실이 마무리된 자리에는 교회 역사 처음으로 유치부에서 영유아부를 독립하여 신설했다. 유치부의 인원이 늘어나서 취한 조치였고 특히 아기를 데리고 오는 젊은 부부 신도들을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애초 아기를 둔 부모들은 예배당 4층 자모실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아이를 돌보느라 거의 예배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유아부가 신설되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젊은 신도들의 공동체가 활성화되었다. 이때 조직된 젊은 부부 성도들은 갈수록 새밭교회의 핵심이 되어가면서 교회를 젊게 하고 활기차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교육부서의 가장 어린 세대여서 자연스레 아이들이 자라면서 유치부 이상의 부서로 진급하면서 교육부서를 풍성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영유아부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후 지역의 비신자를 아우르는 새밭 아기학교를 개설하여 놀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교회 학교의 외연을 넓힌 일도 관련된 성과로 꼽을 수 있다.

     

     ▲ 그림 48 2016년 9월 새밭 아기학교 입학식


      이후에도 교육관으로 쓰게 된 신관을 각 교육부서의 필요에 따라 리모델링 하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차세대를 키우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비록 교회 활동이 어린이, 청소년들의 가장 선진적인 문화였던 과거처럼 출석 인원이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구 감소, 교회 바깥에 다양한 문화 발달 등으로 많은 교회들이 교회 학교를 운영하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고 있다.

      평신도를 위한 성경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새밭 바이블 칼리지>라는 이름으로 제자훈련’,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의 뒷골목 풍경’, ‘성경의 파노라마등의 주제로 상시적인 성서 공부가 진행되었다. 특별히 새신자들에게는 새가족 성경공부프로그램이 제공되어 교회에 첫 발을 내디딘 사람들이 알고 싶은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과 교리, 교단의 핵심 지식을 전하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2016년부터 평신도 신앙강좌를 개설하여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들을 초빙해 수준 높은 성경교육을 제공했다. 특히 2017년은 <장년 교회학교>로 프로그램의 질을 높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사를 전공한 김주한 신학대학원장에게 의뢰해 총 9주에 걸쳐 종교개혁과 교회의 향방에 대해 배우는 기념비적인 강좌가 진행되었다. 이후로도 장년 교회학교는 신학과 교수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깊이 있는 성서 교육의 대표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

     

     ▲ 그림 49 2013년 2월 새밭 바이블칼리지 수료식


      교회의 하드웨어를 보완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날로 심각해지는 주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부터 오랜 준비를 거쳐 교회 뒤편 두 채의 주택을 매입하여 주차장을 마련하였고 20195월 사업을 일단락지었다. 이 주차장 부지는 훗날 예배당 건축이나 교육관 건립 등을 비전으로 하는 미래 지향적 공간이기도 하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교회 앞 공간에 하랑, 예랑 카페를 만들어 부족했던 교인들의 쉼터를 마련하여 교회의 모임과 소통이 한결 수월해지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교회는 더 따뜻한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예배와 교인을 위한 중보기도위원회가 만들어져 매주 예배를 위해, 환우를 위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다. 어린이,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는 ‘3대가 드리는 예배로 통합 예배를 드리면서 세대를 이어가고 세대 간 소통과 사랑을 나누는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설이면 교회 어르신들에게 세배하는 전통도 깊어간다. 웃어른 모시기 행사도 매년 빠지지 않고 있다.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동아리를 만들어, 5주차가 있는 달에 자전거, 등산, 문화유산답사, 탁구, 독서 등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임을 나누고 있다. 그런 힘을 바탕으로 전교인 야외 예배, 전교인 체육대회 등의 행사를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며, 2017813~15일에는 전교인의 단합과 일치된 비전 공유를 위한 전교인 수련회를 횡성 숲체원에서 가지며 교회 공동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또 아이들 돌, 진학을 일일이 함께 축복하며 진정한 교회 가족공동체의 사랑을 나누고 있다.

     

    ▲ 그림 50 2013년 10월 전교인 야외예배


    ▲ 그림 51 2019년 4월 문화유산답사클럽 답사 모습


     ▲ 그림 52 2015년 5월 3일 3대가 함께 드리는 예배


    ▲ 그림 53 2014년 6월 창립 55주년 예배 4대가 함께 예배 드린 허유찬, 황만치 권사 댁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비전으로 새밭교회는 10년을 달려왔다. 그 가운데 신도의 수 등 양적인 성장도 이루었고 따뜻하고 사랑을 나누며 선교와 봉사에 힘쓰는 교회로 발전해왔다. 이제 60주년을 맞아 교회는 새로운 비전을 세우고 다시 한 번 주님의 소명 아래 도약해야 할 것이다.

      올해 우리 교회는 60주년을 맞아 역사를 정리하고, 의미 있는 봉사와 선교를 준비했다. 농촌교회 두 곳을 골라 교회, 사택 리모델링을 하였다. 청년부는 새밭의 뿌리를 찾아 명동촌과 백두산을 탐방할 예정이다. 청소년부는 차세대 발전의 비전을 가지고 미얀마 선교를 떠나려고 한다. 이런 사업들이 우리 교회의 역량을 확인하고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 그림 54 2019년 2월 농어촌교회 건축선교를 떠나며(2019년 공사를 완료한 주차장 부지에서)



    새밭 60년의 역사를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예배의 처소도 없이 출발한 새밭교회가 어느덧 회갑의 나이로 안정화되어, 널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 교회가 60년의 유구한 전통을 잘 이어받아 앞으로도 새밭교회가 하나님의 귀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 교회의 첫 출발

    1959.   6. 14. 장충단 공원에서 첫 예배함. (76명)
    7.   1. 신당동 177번지 2층에 예배 장소를 정하고 새밭교회라 칭함.
    9.   3. 초대 설교자로 안희국 준목과 김계성 전도사 청빙.
    11. 11. 신당동 21-5로 이전.
    1960.   4. 17.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 가입.

     

    ■ 조직교회로서의 출발

    1960. 11. 12. 안희국 준목 사임.
    13. 정봉조・정승호・ 안병건・황재왕・한요한 장로 임직하여 조직 교회를 이룸.
    1961.   3.   5. 임시목사로 안언약 목사 취임.
    6. 11. 장의순 장로 임직, 김보라 장로 취임.
    1962.   4. 29. 신당동 147-7 2층으로 교회당을 이전.
    6. 30. 안언약 목사 사임.
    1963.   2.   3. 임시당회장으로 정대위 목사 초빙.
    1964.   1.   1. 김해철 전임전도사 부임.(1966. 2. 13. 사임)

     

    ■ 행당동으로 이전

    1965.   8.   1. 성동구 행당동 331-1번지 대지 173평, 연건평 46평을 개축하고 입당.
    1965. 12. 31. 임시당회장 정대위 목사 사임.
    1966.   1.   1. 초대 교역자로 조종협 목사 취임.
    1969.   1.   1. 권호경 전도사 부임하다.(1971. 4. 30. 사임)
    1969. 12.   7. 경기도 안성군 동항리에 교회묘지를 구입.
    1971.   7.   6. 초대 교역자 조종협 목사 사임.
    1972.   6.   1. 2대 교역자로 박동화 목사 취임.
    6. 11. 장동근・임인목・ 박승남 장로 임직.
    1974.   3. 24. 김계성 전도사 명예 전도사로 추대.
    6.   1. 박춘배 전도사 부임.(1975. 9. 14. 사임)
    1976.   5.   1. 민옥희 전도사 부임.(1976. 12. 31. 사임)
    1977.   3. 20. 2대 교역자 박동화 목사 사임.
    4.   1. 김병국 전도사 부임.(1977. 5. 30 사임)
    6.   5. 3대 교역자 김성환 목사 취임.
    9. 28. 성동구 구의동 57번지 대지241평을 매입.

     

    ■ 구의동으로 이전

    1977. 11. 16. 새로 구입한 구의동 건물에서 수요 첫 예배함.
    1978.   3.   1. 이상점 전도사 부임.(1978. 11. 30. 사임)
    1979. 12. 29. 전구식 장로 임직.
    1980.   5.   1. 문성일 전도사 부임.(1981. 11. 30. 사임)
    1981.   3. 29. 3대 교역자 김성환 목사 사임.
    7. 14. 4대 교역자 이영일 목사 취임.
    1982.   1.   1. 김태석 전도사 부임.(1984. 2. 28. 사임)
    4.   2. 신축교회당 착공 예배함.
    (설계자 고려건축, 시공자 : 이병준 집사)
    10. 24. 교회입당 및 추수감사주일 예배함.
    1983.  4. 24. 교회헌당예배 및 김병현 장로 임직.
    5.   9. 인접대지 (62.7평) 구입.
    1984.   3.   7. 새밭 어린이 선교원 개원.
      4.   1. 김현수 전도사 부임.(1985. 6. 30. 사임)
     5. 14. 새밭 지역사회학교 개교.
    6. 10. 창립25주년 기념예배 함.
    7. 15. 지역사회 도서실 개원.
    1985.   7.   1. 김동수 전도사 부임.(1987. 6. 30. 부목사 사임)
    10. 6. 4대 교역자 이영일 목사 사임.
    1986. 3. 30. 5대 교역자 김복기 목사 취임.
    1987.   1.   3. 전체 예산의 10분의 1을 대외 선교비로 책정.
    6. 14. 장상은・심재근 장로 임직 및 장동근 장로 원로장로 추대.
    8.   9. 김수남 전도사 부임.(1990. 9. 21. 부목사 사임)
    1988. 12. 23. 서금자 심방 전도사 부임.(2002. 12. 15. 사임)
    1989.   6. 12. 창립30주년 기념예배 및 지역사회 선교 센터를 삼양동 지역에 개설.
    1990.   3.   4. 이청산 전도사 부임.(1997. 2. 4. 부목사 사임)
    6. 10. 본 교회가 지원하는 돌산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선교 후원회를 조직.
    11. 25. 김영환・배성호 장로 임직.
    1993.   6. 13. 서미숙 장로 임직, 최동갑 장로 취임.
    1994.   5.   3. 사택을 구입하고 봉헌.
    12. 20. 교회당 준공검사 및 소유권 보존등기.
    1995.   4.   6. 가공교회(충남 서천)와 자매결연을 맺고 농촌교회와 연대사업을 구체적으로 실천.
    1996. 11. 24. 장상은 장로 원로장로 추대.
    박준상・라상운・서원석 장로 임직.
    1997.   2.   1. 김미애 전도사 부임.(1997. 8. 11. 사임)
    2. 16 상암동교회(이청산 목사 개척)에 개척교회 지원금 5,000만원 특별헌금으로 지원.
    4.   1. 정재동 부목사 부임.(1999. 8. 1 사임)
    10.   6. 장년부 제자훈련 실시.(7명)
    11.   5. 청장년부 제자훈련.(10명)
    1999.   6.   9. 교회창립 40주년 기념예배, 사진전시회, 전임교역자 및 옛 교우 초청.
    8.   1. 김성수 부목사 부임.(2001. 12. 16. 사임)
    10.   3. 김영환 장로 원로장로 추대.
    10. 11.
     
    전교인 전도초청예배를 위한 2주간 특별새벽기도회.
    (10.11-23 / 평균 147명)
    2000.   9. 17. 전구식 장로, 원로장로 추대.
    12. 23. 신관건축, 본당증축 및 내부수리공사 완료.
    2002.   2. 24. 김요섭 부목사 부임.(2004. 12. 5. 사임)
    6.   9. 헌당예배 드림.
    심재근 원로장로추대 및 심순선, 이영선, 이대성 장로 임직.
    2003.   2.   2. 고선희 전도사 부임.(2010. 1. 3. 사임)
    6. 14. 창립 44주년 기념주일에 권사 22명 임직.
    2004.   1.   4. 이재철 전도사 부임.(2007. 7. 22. 부목사 사임)
    1. 18. 최동갑 장로 원로장로 추대.
    9. 12. 김병현 장로 원로장로 추대.
    12.   5. 강민구 부목사 부임.(2006. 9. 24. 사임)
    2005.   6. 12. 윤자선・문병옥・임종신 장로 임직.
    8. 30. 사택 매입.(구의2동 108-32)
    2006. 10.   1. 이정재 전도사 부임.(2008. 5. 4. 사임)
    2007.   1.   1. 이도훈 전도사 부임.(2009. 6. 21. 사임)
    2.   8. 말씀동산(성경공부)을 개설.
    6. 17. 창립48주년 기념주일에 권사 39명 임직.
    9. 16. 옥재호 부목사 부임.(2009. 11. 29. 사임)
    10. 28. 서미숙 장로 원로장로 추대.
    2008.   3. 30. 제 1차 캄보디아 크메르 사랑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예배 드림.(12명 참석, 3.30-4.3)
    12. 31. 5대 교역자 김복기 목사 사임.
    2009.   1.   8. 베트남 선교지 방문.(1.8-1.12.)
    6. 18. 제 2차 캄보디아 선교지 방문.(6.18-6.22)
    11. 22. 6대 교역자 목익수 담임목사 취임.
    12. 13. 황기석 부목사 부임.(2012. 5. 27. 사임)
    2010.   1.   3. 50주년 기념교회 “깜폿 새밭교회” 기공
    1. 10. 우은정 부목사 부임.(2011. 7. 17. 사임)
    1. 31. 박병석 부목사 부임.(2013. 12. 15. 사임)
    2. 28. 장기기증 서약 예배.(199명 서약)
    5. 27. 50주년 기념교회인 깜폿 새밭교회 헌당예배 및 제 3차 단기선교.(5.27-6.2 / 총 19명 파송)
    6. 13. 박준상・심순선 장로 원로장로 추대.
    7.   4. 제1기 새밭 바이블 칼리지 개강.
    2011.   3. 13. 제2기 새밭 바이블 칼리지 개강.
    4. 24. 전교인 봉사활동.(JESUS DAY, 140명 참석)
    5. 13. 새밭 1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5.13-5.15) (시애틀 형제교회와 연합)
    (광림 세미나하우스 / 참가자 50명, 봉사자 60명)
    5. 15. 시애틀형제교회와 자매결연.
    6. 23. 제4차 캄보디아단기선교.(6.23-6.29, 총 33명 파송)
    9. 24. 두란노 동부 50기 아버지학교 개설.(9.24-10.22)
    11. 13.
     
    라상운・윤자선 장로 원로장로 추대.
    안수집사 8명, 권사 29명 임직.
    12. 30. 감비아 선교타운 인수계획을 추진.
    2012.   2. 26. 박명신 전도사(필리핀), 김은혜 전도사(인도) 선교사로 파송.
    3.   4. 제3기 새밭 바이블 칼리지를 개강.
    5.   4. 새밭 제2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5.4-5.6)
    (광림 세미나하우스 / 참가자 52명, 봉사자 60명)
    6.   3. 강원용 부목사 부임.(2016. 1. 31. 사임)
    7.   1. 서원석 장로 원로장로 추대.
    10. 14. 제4기 새밭 바이블 칼리지 개강.
    11. 18. 남아프리카 공화국 새밭 시큘라카셀 선교어린이집을 개원.
    2013.   1.   6. 하늘뜻 동문교회 개척지원헌금을 전달.
    1.   6. 천민희 협동목사 부임.(2017. 1월 사임)
    4.   1. 이영선 장로, 원로장로로 추대.
    4. 12.
     
    새밭 제3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4.12-4.14)
    (광림 세미나하우스 / 참가자 61명, 봉사자 70명)
    5. 25. 미얀마 양곤 교회개척을 위한 비전트립을 진행.
    6.   9. 정재석・이태권 장로 임직.
    6. 30. VIP 초청주일 행사.(간증 : 송채환 집사)
    8. 31. 두란노 동부 아버지학교 59기 개설.(8.31-10.5)
    12.   8. 안수집사 7명 임직.
    2014.   1.   5. 강승영 전도사 부임.(2016. 12. 25. 사임)
    양 훈 전도사 부임.(2015. 12. 6. 사임)
    2. 21. 미얀마 양곤 개척교회 헌당예배 및 단기선교. (2.21-2.26, 총 25명 파송)
    3. 13. 제5기 새밭 바이블칼리지 개강.
    3. 30. 클럽 개강예배를 드리고 클럽 모임 실시.
    4. 25.
     
    새밭 제4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4.25-4.27)
    (광림 세미나하우스 / 참가자 29명, 봉사자 57명)
    5. 12. 시애틀형제교회 자매결연 및 컨퍼런스 참석. (5.12-5.23 / 10명 참석)
    10.   7. 두란노 동부 어머니학교 25기를 개설. (10.7-11.11 / 47명 수료)
    10. 19. 은혜교회 입당예배.(파송 / 박명신 목사, 이대성 장로)
    10. 26. 권사 피택을 위한 공동의회.(총 21명 피택)
    2015.   1.   4. 차경덕 교육목사 부임.(2015. 12. 27. 사임)
    1.   5. 교회 버스 35인승 구입.
    2.   4.
     
    미얀마 양곤(다공 새밭센타) 단기선교. (2.14-2.9 / 10명 파송)
    3.   8. 제6기 새밭 바이블 칼리지 개강.
    4.   9. 새밭 제1기 아기학교 개강.(6. 17. 종강 / 12명 수료)
    4. 12. 교회 홈페이지 개편.
    5. 10. 주차장 부지 매입. (구의동 57-27, 79.7㎡/ 구의동 57-25, 130.6㎡)
    6. 14. 56주년 창립 기념주일 예배 및 성경필사본 헌정.
    최민성・홍종호 장로임직.
    안수집사 7명, 권사 21명 임직.
    7. 29. 캄보디아 단기선교 진행.(7.29-8.4) (총 32명 참가 / 청년・청소년부 중심)
    9. 17. 새밭 제2기 아기학교 개강.(11. 26. 종강 / 16명 수료)
    10. 23. 새밭 제5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10.23-10.25)
    (오륜빌리지 / 참가자 38명, 봉사자 87명)
    2016.   1.   3. 김미희 부목사 부임.(2017.12.24. 사임)
    1. 31.
     
     
    이천범 부목사 부임.(2017.11.26. 사임)
    신나실 교육목사(어린이부) 부임.
    박혜송 교육목사 부임.(2017.11.26. 사임)
    2. 26. 미얀마 단기선교.(2.26-3.2 / 16명 참석)
    3. 17. 새밭 제7기 바이블 칼리지 개강.
    3. 20. 장년주일학교 신앙강좌 1기 개강.
    강사 : 송순열 교수(한신대 신약학) (3.20- 6.12 / 총 23명)
    3. 29. 새밭 제3기 아기학교 개강.(3.29-6.14 / 총 10명)
    5. 22. 박문재 장로를 협동장로로 추대.
    9. 11. 장년주일학교 신앙강좌 2기 개강.
    강사 : 김창주 교수(한신대 구약학) (9.11-11.27 / 총 17명)
    9. 22. 새밭 4기 아기학교 개강.(9.22-12.8 / 총 21명)
    10. 14. 새밭 제6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10.14-10.16)
    (다일영성수련원 / 참가자 52명, 봉사자 63명)
    11.   6. 새밭 실업인회 주관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감사 찬양제.
    12.   1. 배성호 장로 원로장로로 추대.
    12.   9. 선교위원회 임원단 미얀마 다공센타 방문.  (12.9-12.12 / 5명 참가)
    12. 11.
     
    장로 시무연한 조정과 교회 자산(차량)매각․
    매입을 위한 공동의회
    2017.   1.   1. 김효준 부목사 부임.(2018.10.27. 사임)
    2. 12. 장년교회학교 종교개혁500주년 기념특강(Ⅰ) 개강.
    강사 : 김주한 교수(한신대 교회사)
    3. 30. 새밭 5기 아기학교 개강.(3.30-6.22 / 총 12명)
    4. 16. 장년교회학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강(Ⅱ) 개강.
    강사 : 류장현 교수(한신대 조직신학)
    8. 13. 전교인 수련회 ‘한바탕’ 진행.(8.13-8.15)  (강원도 횡성 숲체원 / 참가자 185명)
    9. 14. 새밭 6기 아기학교 개강.(9.14-12.7 / 총 15명)
    12. 24.
     
    심 훈 부목사 부임.(장년목장, 새가족)
    박은창 전도사 부임.(2019.12.29. 사임)
    2018.   1.   8. 미얀마 다공새밭센터 및 껄로지역 단기선교.  (청년, 청소년부 중심 / 1.8-1.15 / 25명 참가)
    3.   4. 권사 및 안수집사 피택을 위한 공동의회.
    -권사 : 김봉순 노은진 마선옥 명영초 민영자 박흥순 백문숙 백선일 신경화 오류민 이은순 이춘란 정숙현 정희숙 (14명)
    -안수집사 : 김광식 김대건 송병훈 심경희 이 빈 이상경 이경원(7명)
    3. 29. 새밭 7기 아기학교 개강.(3.29-6.15 / 총 7명)
    4. 27. 새밭 제7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4.27-4.29)
    (다일영성수련원 / 참가자 50명, 봉사자 72명)
    5.   6. 전반기 장년교회학교 “건강한 교회와 하나님의 선교” 개강.
    강사 : 최성일 교수(한신대 선교신학)
    5. 23. 교회창립 기념부흥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 진행.
    강사 :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
    6. 10. 교회창립 59주년 기념주일에 배성호 원로장로 추대 및 장로∙권사∙안수집사 취임 및 임직.  (장로 6명, 권사 14명, 안수집사 7명)
    9.   2. 하반기 장년교회학교 “오래된 미래, 히브리 성서의 세계와 기독교신앙” 개강.
    강사 : 박경철 교수(한신대 구약학)
    9. 15. 중직자 수련회 진행(마석기도원)
    11. 29. 미얀마 다공 새밭센터 단기선교.(11.29-12.7)
    (다공새밭센터 보수 및 어린이사역 / 8명 참가)
    12.   2. 김기하 전도사 부임.(2020.12.27.사임)
    2019.   2. 24. 교회창립 60주년 농어촌교회 건축선교.(길천교회 사택 및 교회 보수 / 2.24-3.2 / 장년 9명 참석)
    3. 28. 새밭 제8기 아기학교 개강.(3.28-6.20 / 총 8명 수료)
    4.   3. 교회창립 60주년 기념부흥회 “건강한 교회 공동체” 진행.
    강사 :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원), 신우인 목사(포이에마교회), 백은실 대표(글로벌 커피브레이크 대표)
    5. 28. 새밭 제8기 어메이징터치 영성훈련.(5.24-5.26)  (다일영성수련원 / 100여명 참석)
    6.   6. 교회창립 60주년 기념예배. “홈커밍데이”(오전 10시30분)
    새밭교회 60년사 헌정식.
    교회창립 60주년 기념음악회.(오후 1시30분)
    6. 22. 청년회 비전트립. “교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중국 연길, 용정, 백두산) / 6.22-6.25 / 15명 참석)
    7.   7. 맥추감사주일 「교회오빠」 단체관람.(군자 메가박스 대관)
    7. 30. 푸른이부 미얀마 단기선교.(다공새밭센터 어린이사역, 껄로 고산족 사역 / 7.30-8.5 / 총 26명 참석)
    9. 19. 새밭 제9기 아기학교 개강.(9.19-12.18 / 총 10명 수료)
    9. 26. 교회창립 60주년 기념 성지순례. “ReBible ReVive”
    (이스라엘 / 9.26-10.4 / 총 22명 참석)
    10.   6. 하반기 장년교회학교 “예술로 만나는 성경” 개강. (10.6-10.27)
    강사 : 구미정 교수(숭실대학교 초빙교수)
    11. 10. 2019 중직자 세미나. “마음을 여는 경청과 대화”
    강사 : 백은실 대표(글로벌 커피브레이크 대표)
    11. 13. 서울·경기지역 원로목사회 초청예배. “화해의 성령이여 하나되게 하소서” (100명 참석)
    12. 12. 미얀마 건축선교(다공새밭센터 전기 및 천정보수 / 12.12-12.19 / 총 6명 참석)
    12.   8. 장명훈 교육목사(푸른이부) 부임.
    2020.   1.   5. 차세대 학제개편
    씨앗부(3-5세) / 새싹부(6-9세) / 열매부(10-13세) / 푸른이부(14-19세)
    1. 12. 장년교회학교 “모세오경” 개강
    강사:심 훈 목사
    3. 22. 한나회실 온열방으로 리모델링(재정후원: 임종신 장로, 변명식 권사)
    5.   3. 근속교사(5년, 10년) 시상
    (5년:이은주(윤) 구혜림 심민경) (10년:이동미 임승관 주신일 장신우)
    5. 19. 상반기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반찬 나눔 봉사
    5. 24. 스마트요람 설명회 및 스마트요람으로 전환
    6. 14. 교회 창립 61주년 기념 교회사 퀴즈대회 개최
    6. 15. “슬기로운 신앙생활” 온라인 성경통독 진행
    7. 19. QR코드기반 전자 출입명부 시스템 도입
    8. 16. 온라인 가족 찬양제 개최
    11. 10. 하반기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반찬 나눔 봉사
    12. 27. 서무경 전도사(목장,예배,사무행정) 부임